정상영 명예회장, KCC 마지막 출근 마치고 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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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병원서 영결식·발인
정몽진·정몽익·정몽열 회장 등
가족·친척 30여명 참석…비공개 진행
정몽준·정몽규·정의선 마지막 배웅
KCC 사옥 거쳐 용인 선영으로
"사업보국 큰 뜻…정도경영 기업인"
정몽진·정몽익·정몽열 회장 등
가족·친척 30여명 참석…비공개 진행
정몽준·정몽규·정의선 마지막 배웅
KCC 사옥 거쳐 용인 선영으로
"사업보국 큰 뜻…정도경영 기업인"
“고인은 산업보국(産業報國)과 기술입국(技術立國)의 높은 뜻을 대한민국 사회에 깊이 심어두고 현장을 벗어나셨습니다.”(김희옥 전 동국대 총장)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막냇동생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 62년 동안 지켰던 경영 현장을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큰형 곁으로 떠났다.
정상영 명예회장의 영결식과 발인이 3일 서울아산병원에서 부인 조은주 여사와 아들인 정몽진 KCC 회장, 정몽익 KCC글라스 회장, 정몽열 KCC건설 회장 등 가족과 친인척 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비공개로 열렸다. 현대가(家) 장손인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을 비롯해 고인의 조카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 정몽국 엠티인더스트리 회장, 정몽석 현대종합금속 회장, 정몽규 HDC그룹 회장, 정몽혁 현대종합상사 회장 등도 영결식에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영결식은 주원식 KCC글라스 부회장이 장례위원장을 맡아 진행했다. 주 부회장은 “큰 별이 졌다”며 “현재도 임직원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고 애도했다. 고인의 모교인 동국대 총장을 지낸 김희옥 전 헌법재판관은 추도사를 통해 “(고인은) 언제나 ‘나라가 있어야 기업이 있다, 국적 없는 기업과 경제는 없다’고 말했다”며 “고인의 높은 뜻을 승계한 아드님과 직원들이 회사를 더 큰 발전으로 이끌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인원 제한으로 영결식이 열린 약 30분 동안 범현대그룹 전·현직 임직원 등 100여 명은 복도와 건물 밖 등에서 애도의 뜻을 표했다. 운구차가 떠나기 전 이들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 잠시 묵념했다.
영결식 후 운구차는 각계 인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빈소를 떠났다. 운구 행렬은 정 명예회장이 생전에 거주하던 서울 이태원동 자택과 고인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는 서초구 KCC건설 본사, KCC 본사를 돈 뒤 장지인 경기 용인시 선산으로 향했다.
1936년 강원 통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22세 때인 1958년 8월 KCC의 전신인 금강스레트공업을 창업해 KCC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냈다. KCC그룹은 자산 기준(지난해 11조원) 경영계 32위로 성장했다. 수입에 의존하던 도료, 유리, 실리콘 등을 자체 개발해 기술 국산화와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인은 창업주로서는 드물게 60여 년을 경영일선에서 뛰었다. 국내 기업인 중 가장 오래 경영현장을 지킨 기업인이란 평가도 있다.
고인은 형제 가운데 외모와 말투, 걸음걸이 등이 큰형 정주영 명예회장을 가장 많이 닮아 ‘리틀 정주영’으로도 불렸다. 그 스스로도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정주영 명예회장을 꼽았다. 소탈하고 검소한 성격으로 평소 임직원에게 주인의식과 정도경영을 강조한 경영자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영(永)’자 항렬의 현대가 창업 1세대 경영인 시대는 막을 내렸다.
서기열 기자 philos@hankyung.com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막냇동생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 62년 동안 지켰던 경영 현장을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큰형 곁으로 떠났다.
정상영 명예회장의 영결식과 발인이 3일 서울아산병원에서 부인 조은주 여사와 아들인 정몽진 KCC 회장, 정몽익 KCC글라스 회장, 정몽열 KCC건설 회장 등 가족과 친인척 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비공개로 열렸다. 현대가(家) 장손인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을 비롯해 고인의 조카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 정몽국 엠티인더스트리 회장, 정몽석 현대종합금속 회장, 정몽규 HDC그룹 회장, 정몽혁 현대종합상사 회장 등도 영결식에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영결식은 주원식 KCC글라스 부회장이 장례위원장을 맡아 진행했다. 주 부회장은 “큰 별이 졌다”며 “현재도 임직원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고 애도했다. 고인의 모교인 동국대 총장을 지낸 김희옥 전 헌법재판관은 추도사를 통해 “(고인은) 언제나 ‘나라가 있어야 기업이 있다, 국적 없는 기업과 경제는 없다’고 말했다”며 “고인의 높은 뜻을 승계한 아드님과 직원들이 회사를 더 큰 발전으로 이끌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인원 제한으로 영결식이 열린 약 30분 동안 범현대그룹 전·현직 임직원 등 100여 명은 복도와 건물 밖 등에서 애도의 뜻을 표했다. 운구차가 떠나기 전 이들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 잠시 묵념했다.
영결식 후 운구차는 각계 인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빈소를 떠났다. 운구 행렬은 정 명예회장이 생전에 거주하던 서울 이태원동 자택과 고인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는 서초구 KCC건설 본사, KCC 본사를 돈 뒤 장지인 경기 용인시 선산으로 향했다.
1936년 강원 통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22세 때인 1958년 8월 KCC의 전신인 금강스레트공업을 창업해 KCC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냈다. KCC그룹은 자산 기준(지난해 11조원) 경영계 32위로 성장했다. 수입에 의존하던 도료, 유리, 실리콘 등을 자체 개발해 기술 국산화와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인은 창업주로서는 드물게 60여 년을 경영일선에서 뛰었다. 국내 기업인 중 가장 오래 경영현장을 지킨 기업인이란 평가도 있다.
고인은 형제 가운데 외모와 말투, 걸음걸이 등이 큰형 정주영 명예회장을 가장 많이 닮아 ‘리틀 정주영’으로도 불렸다. 그 스스로도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정주영 명예회장을 꼽았다. 소탈하고 검소한 성격으로 평소 임직원에게 주인의식과 정도경영을 강조한 경영자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영(永)’자 항렬의 현대가 창업 1세대 경영인 시대는 막을 내렸다.
서기열 기자 phil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