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국민의힘'이 기업이었다면
2000년대 중반, 전자제품 유통시장에 이색 사업자가 등장했다. 이 분야 최강자 지위를 굳혀가고 있던 하이마트에 도전장을 내민 A사였는데, 전략이 특이했다. 대부분 매장을 하이마트 판매점 근처에 설립했다. 1위 업체와 ‘맞짱 뜨는’ 매장을 곳곳에 내면서도 매체광고를 전혀 하지 않았다. 대신 ‘같은 제품을 하이마트 매장보다 조금 더 싸게 파는’ 전략에 승부를 걸었다. 하이마트 매장 앞에서 “더 싸게 파는 곳이 가까이에 있다”는 내용의 홍보전단지를 돌렸다. 매체광고를 아낀 돈으로 제품값을 깎아주면 하이마트 고객들이 저절로 몰려올 것이라는 셈법이었다.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 개장 초 잠시 반짝하는 듯했던 매장 대부분에 손님의 발길이 뜸해졌고, A사는 얼마 못가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고객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탓이다. 하이마트는 품목별로 잘 훈련받은 판매전문가들을 배치해 손님들에게 맞춤형 안내를 해준 반면, A사에는 그런 인력과 노하우가 없었다. 같은 제품을 몇 푼이라도 싸게 팔기만 하면 하이마트 고객을 손쉽게 가로챌 수 있을 것이라던 A사의 ‘따라쟁이 전략’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대한민국 제1야당인 국민의힘이 요즘 하는 행태가 잊고 있었던 A사 기억을 되살려냈다.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국민의힘이 내놓는 정책 아젠다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판박이인 경우가 너무 많아져서다. 민주당이 내놓은 ‘코로나 4차 재난지원금’ 지급 제안에 한 박자 늦춰 숟가락을 얹더니 부산 가덕도에 동남권 신공항을 짓자는 여당 아젠다에도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맞장구를 치고 나왔다. 두 아젠다를 시행하려면 각각 수십조원 규모의 엄청난 재정이 들어가야 하는 데다 실효성 문제까지 더해져 ‘선거용 포퓰리즘’ 논란이 불거지고 있는 터다.

민주당의 아젠다를 ‘돈으로 표를 사려는 포퓰리즘’이라고 공격하다가 슬그머니 그 아젠다에 올라타고, 한술 더 뜨기까지 하는 게 어느새 국민의힘의 선거운동 공식이 돼버렸다. 작년 4월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도 그랬다. 여당이 코로나 사태 대책으로 소득 하위 70% 가구에 긴급재난지원금을 100만원(4인 가구 기준)씩 지급하는 방안을 내놓자 국민의힘(당시 미래통합당)은 ‘모든 가구에 1인당 100만원씩 400만원 지급’을 대응카드로 던졌다. ‘해도 너무한 포퓰리즘 맞불’이라는 지적에 통합당은 “선거 승리를 위해 불가피하다”고 했지만, 결과는 대망신이었다. 민주당과 위성정당 등 범여권이 전체 국회의석(300석)의 60%를 휩쓸고, 통합당은 100석을 겨우 넘기는 대참패를 했다.

독자적인 색깔을 드러내기보다 경쟁자의 상품을 적당히 각색해서 내놓는 전략이 성공할 수 없는 이유는 뻔하다. 짝퉁을 갖고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원조’를 이길 수 없다는 건 마케팅의 기본상식이다. 정치판이라고 다를 게 없다. 더 심각한 건 선거철 공약만이 아니라 주요 정책분야에서 국민의힘의 ‘여당 따라쟁이’ 행태가 확산되고 있는 현상이다. 대표적인 게 작업현장에서 인명사고가 나면 사업주를 무조건 형사 처벌하는 내용의 중대재해처벌법을 제정하는 데 국민의힘이 보인 모습이다. “사고가 났다고 최고경영자를 감옥에 가두면 누가 기업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기업인들의 절박한 호소가 이어졌지만 “의석에서 밀리는데 반대한들 노동계에 더 미운털만 박힐 뿐 실익이 없다”는 식의 면피에 급급했다.

정부와 여당은 ‘공정경제 3법’으로 부르고 기업들은 ‘규제 3법’으로 부른 상법과 공정거래법 개정안 등의 처리 과정에서도 국민의힘은 “우리도 여당과 같은 생각”이라며 들러리를 서줬다. 시장경제의 근본인 재산권과 기업 자율을 부정하는 위헌적 내용을 담았다는 지적에 귀를 막았다. 5년차에 접어든 문재인 정부의 ‘독주(獨走)’ ‘폭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도 ‘대안 정당’으로서 철학과 비전을 담은 아젠다로 존재감을 내보인 적이 없다. 그러면서 당 간판을 ‘국민의힘’으로 바꿔 단 건 정말 가관이다. 명색이 정당 이름에 어떤 가치를 추구하겠다는 메시지는 없고 “우리가 당신들의 힘이니 그리 알라”는 식이니, 이런 무(無)개념과 오만이 없다. 당의 정체성부터 바로세우는 일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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