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박자 빠른 구상·실행이 아젠다 선점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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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심 출판인 (1) 한성봉 동아시아 대표
과학 대중서 출판사 주목
출판도 과학도 몰랐던 '문외한'
불모지 개척 심정으로 도전
'정재승의 과학콘서트' 첫 히트
'우리가 빛의 속도로' 17만부
과학 대중서 출판사 주목
출판도 과학도 몰랐던 '문외한'
불모지 개척 심정으로 도전
'정재승의 과학콘서트' 첫 히트
'우리가 빛의 속도로' 17만부
국내 출판계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위기 속에서도 지난해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뒀다. ‘집콕 생활’이 늘면서 책을 찾는 사람이 늘어서다. 교보문고의 지난해 한국소설 판매량은 전년 대비 30.1% 늘면서 역대 최다 판매량을 기록했다. 주식 투자 붐에 힘입어 지난달 경제·경영 분야 도서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74.7% 증가했다. 과학서 출간도 여느 해보다 많았다. 특히 차별화된 콘셉트로 경쟁력을 강화한 강소 출판사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신축년을 맞아 소처럼 뚝심있게 한 길을 가고 있는 강소 출판사 대표들을 만나 그 비결을 들어본다.
공상과학(SF)문학은 오래도록 소수 마니아의 장르로 여겨졌다. 2019년 6월 출간된 김초엽 작가의 단편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그런 통념을 완전히 깨버렸다. 지난해 10월까지 17만 부가 팔렸다. SF장르로는 이례적이다. 그해 민음사의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고 대형서점들의 ‘올해의 책’으로도 선정됐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인정받은 셈. ‘김초엽 신드롬’을 만들어낸 과학소설의 발굴은 한 출판사의 작은 도전에서 시작됐다.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대중서들로 주목받고 있는 출판사 동아시아다.
한성봉 동아시아 대표는 2016년 SF문학 전문 자회사인 허블을 설립하고 한국과학문학상을 제정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도 이 문학상 수상작이다. 한 대표는 “21세기가 더 이상 과학과 뗄 수 없는 사회가 된 상황에서 문학이라는 상상력의 집을 하나 더 지은 것”이라며 “장르소설에 비해 더욱 우리 현실 안으로 들어와 있는 과학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을 문학적 서정성과 잘 접목시킨 게 주효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한 대표가 동아시아를 세운 건 1999년. 3년여의 일본 생활을 접고 막 불혹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대학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출판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겁없이 출판계에 뛰어들었다. 진입장벽이 높은 문학, 철학, 사회학 같은 인문·사회 분야 대신 과학이 눈에 들어왔다. “1990년대 중반 일본 서점에 가면 교양과학서부터 과학잡지까지 과학서가 빼곡했는데 한국 서점에선 초라했어요. 기껏해야 번역서 몇 권 정도였죠.”
처음부터 과학 전문 출판사를 지향하진 않았다. 과학 전문서 대신 어떤 담론을 표현하는 데 있어 과학적 방법론을 차용한 책을 주로 냈다. 과학의 힘을 믿었고, 과학을 인문학, 사회학 등과 융합한 책이 많이 읽히리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했다.
“20세기 제조업 시대엔 과학이 특정 과학기술인의 전유물이었지만 이젠 스마트폰부터 내비게이션이나 자율주행, AI 등 우리 삶 안에 과학이 깊숙이 들어왔어요. 언젠가는 과학에 대중적으로 접근하기 쉬워질 때가 올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동아시아라는 출판사의 이름을 알린 베스트셀러 《정재승의 과학콘서트》도 이런 확신에서 탄생했다. 한 대표는 “정재승 KAIST 교수님의 천재성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라면서도 “이 책이 지니는 사회적 의미는 크다”고 자평했다. 이 책을 시작으로 이은희 박사의 《하리하라의 생물학카페》, 최재천 교수의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등 대중적 과학서가 잇따라 나오면서 붐을 일으켰다. 한 대표는 “그 전까지 대중과학서를 쓰는 국내 저자가 거의 없었는데 이 책을 계기로 독자 사이에서 국내 과학서도 재미있다는 분위기가 생겼다”며 “대중과학서 시장의 문을 연 셈”이라고 설명했다.
동아시아는 ‘아젠다형’ 출판사다. 돈을 위해 시장의 반응을 좇아다니는 트렌드형 출판사와 달리 아젠다를 선점해 트렌드를 반 박자 빠르게 치고 나간다. 2016년 2월 고급레이저간섭계중력파관측소(LIGO·라이고)가 ‘중력파’ 탐지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후 약 2주 만에 관련 도서를 낸 것도 아젠다 추구 전략의 결과였다. 최소 1년은 걸릴 일을 2주 만에 해낸 것.
그해 3월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세계적 바둑 대결 이후 동아시아는 12월에 《김대식의 인간 vs 기계》를 냈다. 대중과 과학의 접점을 중시한 한 대표가 오래 전부터 준비한 덕분이었다. 그의 아젠다형 사고는 2017년 어른을 위한 체험형 과학잡지인 ‘메이커스’ 창간으로 이어졌다. 한 대표는 출판을 하면서 항상 ‘지금, 여기’를 생각한다며 이렇게 강조했다.
“다른 분야와 달리 출판은 발이 느려요. 세상의 모든 이슈는 순식간에 등장하는데 책으로 나오려면 최소 1년은 걸리죠. 대중 출판인은 다양한 사회적 의제에 타이밍을 맞추고 그것을 통해 즐거움을 느끼는 기획자입니다. 출판계의 일반적 속도보다 반 박자 빨리 구상하고 실행한 것이 사회적 노출 시기와 잘 맞아떨어질 때면 어떤 성취감을 느낍니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공상과학(SF)문학은 오래도록 소수 마니아의 장르로 여겨졌다. 2019년 6월 출간된 김초엽 작가의 단편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그런 통념을 완전히 깨버렸다. 지난해 10월까지 17만 부가 팔렸다. SF장르로는 이례적이다. 그해 민음사의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고 대형서점들의 ‘올해의 책’으로도 선정됐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인정받은 셈. ‘김초엽 신드롬’을 만들어낸 과학소설의 발굴은 한 출판사의 작은 도전에서 시작됐다.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대중서들로 주목받고 있는 출판사 동아시아다.
한성봉 동아시아 대표는 2016년 SF문학 전문 자회사인 허블을 설립하고 한국과학문학상을 제정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도 이 문학상 수상작이다. 한 대표는 “21세기가 더 이상 과학과 뗄 수 없는 사회가 된 상황에서 문학이라는 상상력의 집을 하나 더 지은 것”이라며 “장르소설에 비해 더욱 우리 현실 안으로 들어와 있는 과학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을 문학적 서정성과 잘 접목시킨 게 주효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한 대표가 동아시아를 세운 건 1999년. 3년여의 일본 생활을 접고 막 불혹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대학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출판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겁없이 출판계에 뛰어들었다. 진입장벽이 높은 문학, 철학, 사회학 같은 인문·사회 분야 대신 과학이 눈에 들어왔다. “1990년대 중반 일본 서점에 가면 교양과학서부터 과학잡지까지 과학서가 빼곡했는데 한국 서점에선 초라했어요. 기껏해야 번역서 몇 권 정도였죠.”
처음부터 과학 전문 출판사를 지향하진 않았다. 과학 전문서 대신 어떤 담론을 표현하는 데 있어 과학적 방법론을 차용한 책을 주로 냈다. 과학의 힘을 믿었고, 과학을 인문학, 사회학 등과 융합한 책이 많이 읽히리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했다.
“20세기 제조업 시대엔 과학이 특정 과학기술인의 전유물이었지만 이젠 스마트폰부터 내비게이션이나 자율주행, AI 등 우리 삶 안에 과학이 깊숙이 들어왔어요. 언젠가는 과학에 대중적으로 접근하기 쉬워질 때가 올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동아시아라는 출판사의 이름을 알린 베스트셀러 《정재승의 과학콘서트》도 이런 확신에서 탄생했다. 한 대표는 “정재승 KAIST 교수님의 천재성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라면서도 “이 책이 지니는 사회적 의미는 크다”고 자평했다. 이 책을 시작으로 이은희 박사의 《하리하라의 생물학카페》, 최재천 교수의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등 대중적 과학서가 잇따라 나오면서 붐을 일으켰다. 한 대표는 “그 전까지 대중과학서를 쓰는 국내 저자가 거의 없었는데 이 책을 계기로 독자 사이에서 국내 과학서도 재미있다는 분위기가 생겼다”며 “대중과학서 시장의 문을 연 셈”이라고 설명했다.
동아시아는 ‘아젠다형’ 출판사다. 돈을 위해 시장의 반응을 좇아다니는 트렌드형 출판사와 달리 아젠다를 선점해 트렌드를 반 박자 빠르게 치고 나간다. 2016년 2월 고급레이저간섭계중력파관측소(LIGO·라이고)가 ‘중력파’ 탐지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후 약 2주 만에 관련 도서를 낸 것도 아젠다 추구 전략의 결과였다. 최소 1년은 걸릴 일을 2주 만에 해낸 것.
그해 3월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세계적 바둑 대결 이후 동아시아는 12월에 《김대식의 인간 vs 기계》를 냈다. 대중과 과학의 접점을 중시한 한 대표가 오래 전부터 준비한 덕분이었다. 그의 아젠다형 사고는 2017년 어른을 위한 체험형 과학잡지인 ‘메이커스’ 창간으로 이어졌다. 한 대표는 출판을 하면서 항상 ‘지금, 여기’를 생각한다며 이렇게 강조했다.
“다른 분야와 달리 출판은 발이 느려요. 세상의 모든 이슈는 순식간에 등장하는데 책으로 나오려면 최소 1년은 걸리죠. 대중 출판인은 다양한 사회적 의제에 타이밍을 맞추고 그것을 통해 즐거움을 느끼는 기획자입니다. 출판계의 일반적 속도보다 반 박자 빨리 구상하고 실행한 것이 사회적 노출 시기와 잘 맞아떨어질 때면 어떤 성취감을 느낍니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