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하늘로 간 '광장'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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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최인훈 소설 《광장》의 첫 문장이다. 주인공 이명준은 극심한 이념 대립과 6·25전쟁 소용돌이에서 ‘반공포로’가 됐다가 휴전 후 중립국행(行)을 택해 인도로 가던 중 배에서 ‘마지막 자유의 공간’인 ‘푸른 광장’으로 몸을 던진다.
이 소설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현동화 씨의 사연도 기구하기 그지없다. 1932년 함경북도 청진 태생인 그는 평양 사동군관학교 1학년 때(18세) 북한군 중위로 전투에 투입됐다. 이후 부상을 입고 국군에 귀순했다가 포로 신세로 전락한 그는 3년간의 수용소 생활 끝에 중립국을 선택했다.
1954년 인도행 수송선을 탔을 때 나이는 스물두 살이었다. 그를 포함한 88명이 인도에 도착했지만, 최종 행선지인 멕시코로 가려던 꿈은 좌절됐다. 2년 뒤 일행 대부분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로 떠나고 그는 동료 두 명과 인도에 남았다.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입국하려던 계획은 무산됐다.
인도의 한인 1세대가 된 그는 정부 돈을 빌려 양계장을 시작했다. 한국에 가발산업이 번성할 때는 인도의 삭발 머리카락을 한국에 수출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기댈 곳 없는 난민 생활 중 1962년 뉴델리에 한국 총영사관이 생기면서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가 한국땅을 다시 밟은 것은 15년 만인 1969년이었다. 북한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어머니와 형제가 서울에 살고 있었다. 당시 그는 “가족이 월남한 사실을 알았더라면 제3국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라며 눈물을 훔쳤다.
이후 그는 인도 한인회장으로 활동하며 한국과 인도의 경제·문화 교류에 힘쓰다 지난 12일 89세로 영면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6·25와 포로수용소, 무국적 난민을 거치며 고난의 삶을 이어온 그는 우리 현대사의 산증인이다.
그 사이에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지만 이념 대립의 그림자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최인훈은 소설 서문에서 “코뮤니즘이 세계를 구하리라는 풍문도 있습니다. 우리는 참 많은 풍문 속에 삽니다. (…)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라고 탄식했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도 ‘슬픈 풍문’이 광장과 밀실을 가리지 않고 ‘육중한 비늘’처럼 무겁게 뒤채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이 소설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현동화 씨의 사연도 기구하기 그지없다. 1932년 함경북도 청진 태생인 그는 평양 사동군관학교 1학년 때(18세) 북한군 중위로 전투에 투입됐다. 이후 부상을 입고 국군에 귀순했다가 포로 신세로 전락한 그는 3년간의 수용소 생활 끝에 중립국을 선택했다.
1954년 인도행 수송선을 탔을 때 나이는 스물두 살이었다. 그를 포함한 88명이 인도에 도착했지만, 최종 행선지인 멕시코로 가려던 꿈은 좌절됐다. 2년 뒤 일행 대부분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로 떠나고 그는 동료 두 명과 인도에 남았다.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입국하려던 계획은 무산됐다.
인도의 한인 1세대가 된 그는 정부 돈을 빌려 양계장을 시작했다. 한국에 가발산업이 번성할 때는 인도의 삭발 머리카락을 한국에 수출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기댈 곳 없는 난민 생활 중 1962년 뉴델리에 한국 총영사관이 생기면서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가 한국땅을 다시 밟은 것은 15년 만인 1969년이었다. 북한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어머니와 형제가 서울에 살고 있었다. 당시 그는 “가족이 월남한 사실을 알았더라면 제3국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라며 눈물을 훔쳤다.
이후 그는 인도 한인회장으로 활동하며 한국과 인도의 경제·문화 교류에 힘쓰다 지난 12일 89세로 영면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6·25와 포로수용소, 무국적 난민을 거치며 고난의 삶을 이어온 그는 우리 현대사의 산증인이다.
그 사이에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지만 이념 대립의 그림자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최인훈은 소설 서문에서 “코뮤니즘이 세계를 구하리라는 풍문도 있습니다. 우리는 참 많은 풍문 속에 삽니다. (…)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라고 탄식했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도 ‘슬픈 풍문’이 광장과 밀실을 가리지 않고 ‘육중한 비늘’처럼 무겁게 뒤채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