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연극 ‘파우스트 엔딩’의 조광화 연출(왼쪽)과 파우스트 역을 맡은 배우 김성녀.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국립극단 연극 ‘파우스트 엔딩’의 조광화 연출(왼쪽)과 파우스트 역을 맡은 배우 김성녀.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1831)는 오랜 시간 전 세계에서 연극, 오페라 등으로 사랑받았다. 그때마다 악마 메피스토텔레스에게 영혼을 파는 주인공 파우스트 역은 원작과 동일하게 남성 캐릭터로 그려졌다. 오는 26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하는 국립극단의 연극 ‘파우스트 엔딩’에선 다르다. 배우 김성녀(71)가 ‘여성 파우스트’를 연기한다.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려운 시도다.

파격적 도전을 앞둔 김성녀와 이 작품을 각색한 조광화 연출(56)을 지난 16일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에서 함께 만났다. 김성녀는 “남성 배우의 전유물이던 파우스트를 여성 배우가 연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놓칠 수 없는 기회라 생각해 불나방처럼 덤벼들었다”고 했다. 이어 “남녀를 떠나 끝없이 도전하고 고뇌하는 파우스트의 모습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관객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광화는 “타인의 상처를 좀 더 빨리 알아채고 서로를 위안할 수 있는 캐릭터로 파우스트를 설정하고 싶었다”고 여성 파우스트의 탄생 배경을 설명했다.

‘파우스트 엔딩’은 국립극단이 지난해 창단 70주년 기념 레퍼토리로 선정한 작품이다. 작년 4월 공연할 예정이었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과 김성녀의 어깨 부상이 겹쳐 공연이 무산됐다. 곡절 끝에 이뤄진 1년 만의 개막 소식에 매진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1년 전만 해도 둘 다 파우스트처럼 열정이 엄청났어요.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넘치는 부분은 절제하고 걷어내면서 작품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됐어요. 전화위복이 된 셈이죠.”(김성녀)

두 사람은 국내 공연계에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이다. 김성녀는 1976년 ‘한네의 승천’으로 데뷔한 이후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마당놀이의 여왕’이란 별명을 갖고 있으며, 1인 32역을 맡은 모노극 ‘벽속의 요정’으로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조광화는 1997년 연극 ‘남자충동’으로 데뷔해 극작가이자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다. 연극뿐 아니라 뮤지컬 ‘베르테르’ 등도 올렸다. 두 사람이 함께 공연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과거 연극 ‘죽음과 소녀’에서 김성녀 선생님 연기를 인상적으로 봤습니다. 에너지가 넘치면서도 고통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모습에 압도됐어요. 이번에 여성 파우스트를 캐스팅할 때 그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올랐어요.”(조광화)

조광화는 방대한 원작을 110분 남짓한 분량으로 압축했다. 원작에서 파우스트는 끝없이 노력하지만 실수로 인해 파국을 초래한다. 그리고 구원을 받는다. 이번 작품에선 파우스트가 결과에 책임지기 위해 스스로 지옥행을 선택한다. 조광화는 “원작 그대로의 ‘파우스트적’ 결말을 끝내겠다는 의미로 제목에 ‘엔딩’을 붙였다”며 “앞만 보고 달려가는 목표지향적인 삶, 결과는 보지 않고 너무 쉽게 구원하는 것을 경계하자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김성녀는 작품의 모든 메시지가 담긴 에필로그를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았다. 장님이 된 파우스트는 지팡이를 짚고 “인간은 노력하며 방황하지만 끝없는 사막 끝에 낙원이 있을까”라고 노래한다.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인간이 하는 일은 영원하지 않고 공허하죠. 많은 것이 압축된 에필로그를 보고 다른 배우들도 ‘선생님, 이 장면 하나로 다 끝난 겁니다’라고 얘기해요.”(김성녀)

다음 작품도 준비하고 있다. 조광화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을 오페라로 만들어 올해 선보일 예정이다. 김성녀는 박칼린 음악감독 겸 연출의 신작에 출연한다. 무대의 매캐한 냄새가 고향 냄새처럼 느껴진다는 김성녀는 “무대의 존엄성이 내 열정의 원천”이라며 “죽는 순간까지 무대에 오르고 싶다”고 말했다. 공연은 다음달 28일까지.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