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사회
영국의 헨리 8세는 100%에 가까웠던 은화의 은 함량을 25%로 줄였다. 그러자 금화가 유통에서 사라졌다. 1558년 엘리자베스 1세가 집권한 뒤 재정고문이었던 토머스 그레셤은 여왕에게 편지를 보내 영국에서 금화가 유통되지 않는 이유는 헨리 8세가 은화의 은 함량을 줄였기 때문이라며, 은화를 다시 주조할 것을 권고했다. 이것이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몰아낸다’는 그레셤의 법칙이 생겨난 배경이다.

그레셤의 법칙에서 악화는 과대평가된 화폐, 양화는 과소평가된 화폐를 말한다. 당시 영국에서는 정부가 정한 교환 비율에 따라 은화와 금화가 동시에 사용됐다. 은 함유량이 줄어들면서 액면가치가 실제가치보다 커졌기 때문에 은화는 과대평가된 화폐로서 악화다. 반면 금화는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됐기 때문에 양화다.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 실제가치보다 액면가치가 높은, 과대평가된 화폐를 사용하는 것이 이익이다. 당시 영국에서 금화가 유통에서 사라진 이유는 은화가 과대평가되고 금화가 과소평가됐기 때문이다.

‘그레셤의 법칙’이라고 명명한 사람은 1858년 스코틀랜드 경제학자 헨리 더닝 매클라우드다. 그런데 1526년에 이미 ‘그레셤의 법칙’을 이야기한 사람이 있다. 폴란드의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다. 14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자 니콜 오렘도 그레셤의 법칙 현상을 언급한 바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그레셤의 법칙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개구리’에 나오는 합창의 내용이다. “아테네 도시에는 현재의 동전이 아닌 금으로 만들어진 고대 주화처럼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얼마나 그 금화를 홀대하고 새로운 것에 손을 뻗쳤던가! 사람들한테도 그랬지. 명예를 존중하고, 조국에 충성하고, 현명하고, 예술에 능통한 학자, 운동선수, 군인, 시인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했나? 그들을 모른 체했지. 아니, 우리는 동전을 선호했다. 한때는 속죄의식의 희생양으로도 쓰일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을 사기꾼, 쓸모없는 정치인, 몽상가, 졸부, 반건달, 개차반들 말이야.”

고대 그리스인들이 요즘 우리 공직사회를 빗대 노래하는 것 같다. 백신 조기 확보에 실패하고도 궤변을 늘어놓는 고위공직자들, 거짓말하는 대법원장, 내로남불 법무부 장관, 주적을 헷갈리는 국방부 장관, 24번의 부동산 정책을 실패한 국토교통부 장관, 경제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면서 기업은 옥죄면 된다는 식으로 법을 마구잡이로 만들어내는 국회의원들, 나라 살림살이는 어찌 됐건 표 얻겠다고 돈을 풀어대는 정치인들, 이런 사람들이 나서서 국정을 펴고 있다.

사실 그레셤의 법칙은 법화(法貨)의 경우에 발생한다. 그레셤의 법칙은 정부 간섭이 없는 경쟁적 시장에서 주조된 금화와 은화에 대해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경쟁적 시장에서는 악화가 사라지고 양화가 교환의 매개체로 사용된다. 만일 어떤 민간주조업자가 금이나 은의 함량을 줄여서 금화나 은화를 주조한다면 사람들은 그의 주화를 사용하지 않고 경쟁자가 만든 더 나은 주화를 사용할 것이다. 질이 떨어지는 주화는 악화이고, 경쟁자의 질이 좋은 주화는 양화다. 따라서 정부의 간섭이 없는 시장에서는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양화가 악화를 몰아낸다. 그러므로 그레셤의 법칙은 ‘악법화가 양법화를 몰아낸다’고 해야 정확하다.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에서 정부 간섭이 없는 경쟁적 시장에서는 품질이 우수한 것이 열등한 것을 제거하고, 효율적인 기업이 비효율적인 기업을 대체하며, 능력 있는 사람이 좋은 위치를 차지한다. 그 반대 현상들은 주로 정부가 개입해 규제하고 통제하는 환경에서 나타난다. 정부의 권력이 클수록 그 폐해는 더 크다.

우리 사회에선 정부 권력이 너무 크다. 간섭 안 하는 분야가 없다. 정부 권력이 클수록 사회는 정실주의로 흐른다. 전문성과 능력보다는 학연, 지연, 혈연에 따라 정부 권력에 가까운 ‘악화’들이 등용된다. 이 ‘악화’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면서 능력 있고 뛰어난 인물과 기업들, ‘양화’들을 몰아내고 있다. 참 불량한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