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철수 쌤의 국어 지문 읽기] 다른 사람과의 대조를 통해 드러나는 '나'의 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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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국어 학습
(9) 수필에서 개성을 드러내는 방법
(9) 수필에서 개성을 드러내는 방법
어떤 친구는 마당에 피는 꽃이 백 가지도 넘는다고 해서 부러워했는데 이런 것까지 쳐서 백 가지냐고 기막힌 듯이 물었다. 듣고 보니 내가 그런 자랑을 한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그 친구는 아마 기화요초가 어우러진 광경을 상상했었나 보다. 내가 백 가지도 넘는다고 한 것은 복수초 다음으로 피어날 민들레나 제비꽃, 할미꽃까지 다 합친 수효다. 올해는 복수초가 1번이 되었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산수유가 1번이었다. 곧 4월이 되면 목련, 매화, 살구, 자두, 앵두, 조팝나무 등이 다투어 꽃을 피우겠지만 그래도 조금씩 날짜를 달리해 순서대로 피면서 그 그늘에 제비꽃이나 민들레, 은방울꽃을 거느린다. … (중략) … 이렇게 그것들을 기다리고 마중하다 보니 내 머릿속에 출석부가 생기게 되고, 출석부란 원래 이름과 함께 번호를 매기게 되어 있는지라 100번이 넘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름을 모르면 100번이라는 숫자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들이 순서를 지키지 않고 멋대로 피고 지면 이름이 궁금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출석을 부르지 않아도 그것들은 올 것이다. 그대로 나는 그것들이 올해도 하나도 결석하지 않고 전원 출석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것들이 뿌리로, 씨로 잠든 땅을 함부로 밟지 못한다. 그것들이 왕성하게 자랄 여름에는 그것들이 목마를까봐 마음 놓고 어디 여행도 못 할 것이다. 그것들은 출석할 때마다 내 가슴을 기쁨으로 뛰놀게 했다. 100식구는 대식구다. 나에게 그것들을 부양할 마당이 있다는 걸 생각만 해도 뿌듯한 행복감을 느낀다. 내가 이렇게 사치를 해도 되는 것일까. 괜히 송구스러울 때도 있다.
그것들은 내가 기다리지 않아도 올 것이다. 그래도 나는 기다린다. 기다리는 기쁨 때문에 기다린다.
박완서, 「꽃 출석부 1」
이런 것까지 … 기막힌
어휘를 이해할 때 뜻만 생각하면 안 될 때가 있다. 특히 문학 작품을 감상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때문에’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어휘로 ‘덕분에’ ‘탓에(바람에)’가 있다. ‘당신 덕분에 성공했다’는 말은 괜찮아도 ‘당신 탓에 성공했다’는 말은 있을 수 없거나 있다고 해도 왠지 놀리는 말처럼 느껴지는데, 그것은 ‘덕분에’와 ‘탓에’가 지닌 느낌 때문이다.‘이런 것까지’라는 말은 ‘친구’라는 사람이 대상(여기에서는 글쓴이의 마당에 핀 꽃들을 말한다)을 보잘것없이 여기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데, 그 이유는 ‘꽃’이 아니라 ‘것’이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막히다’는 말은 ‘어떠한 일이 놀랍거나 언짢아서 어이없다’는 뜻이다. ‘이런 것까지 쳐서 백 가지냐’고 물으면서 ‘기막히’다고 한 것은 ‘백 가지’라는 말(이는 글쓴이가 한 말이다)을 어이없어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어휘가 주는 느낌을 ‘어감’ ‘뉘앙스’라고 한다. 글을 읽을 때는 어휘의 뜻만 아니라 어감까지 고려하도록 하자.
친구는 … 내가
수필은 소설, 시, 희곡 등과 달리 글쓴이가 개성을 직접 드러낸다. 그렇다고 문학적 수사 없이 그대로 나타낸다는 말은 아니다.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흔한 방법 중 하나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대조하는 것이다. 자신의 태도, 심리, 감정 등이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식이다.이 글에서도 ‘나’는 자신의 생각을 ‘친구’의 생각과 대조해서 드러내고 있다. ‘마당에 피는 꽃이 백 가지도 넘는다’는 말에 ‘친구’는 ‘기화요초가 어우러진 광경’을 떠올렸는데, ‘나’는 그 말이 ‘복수초 다음으로 피어날 민들레나 제비꽃, 할미꽃까지 다 합친 수효’였다고 한다.
기화요초(琪花瑤草)는 ‘옥처럼 고운 풀에 핀 구슬처럼 아름다운 꽃’이란 뜻이다. 중국 전설에 요희(瑤姬)라는 여신이 있는데, 요초(瑤草)는 요희가 죽어서 생긴 풀로서 온갖 화초의 신이다. 기화(琪花)는 흰빛으로 핀다는 요초의 꽃이다. 그러니 기화요초는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이겠는가? 물론 국어 지문을 분석할 때 이런 사실까지 알 필요는 없다. 나아가 기화요초의 뜻을 알면 좋겠으나, 꼭 알지 못한다 해도 괜찮다. 다만 ‘복수초, 민들레, 제비꽃, 할미꽃’과 같은 소박한 꽃과 다르다는 것만 느낄 수 있으면, 국어 지문을 훌륭히 분석해 낸 것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어우러지다’와 ‘~ 다음으로 피어날 ~까지 다 합친’을 대조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친구’는 꽃들이 ‘어우러진’, 즉 한꺼번에 핀 모습을 상상했으나 ‘나’는 꽃들이 순서대로 피어나는 것을 말했다.
이를 통해 화려한 꽃들이 한꺼번에 핀 광경을 가치있게 생각하는 ‘친구’와 달리, 소박하지만 자연의 질서에 따라 차례대로 피고 지는 꽃들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글쓴이의 개성을 엿볼 수 있다.
출석부
수필에서는 특히 핵심어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이 글의 중심 소재는 ‘꽃’이다. 그러나 그것과 관련한 글쓴이의 생각을 압축적으로 드러낸 핵심어가 있으니, 바로 ‘출석부’다. 얼마나 중요했으면 제목으로도 삼았겠는가? 그럼 이 ‘출석부’라는 말을 통해 글쓴이가 전하려는 것은 무엇일까?우선 ‘이름’의 가치를 부각한다. ‘이름’은 대상의 존재를 인식할 때 붙여지는 것이다. 결국 꽃에게 ‘이름’이 있다는 것은 꽃들의 존재 가치를 말하는 것이고, 글쓴이가 그 ‘이름’들을 알고 있다는 것은 꽃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둘째, ‘순서’의 의미를 강조한다. ‘순서를 지키지 않고 멋대로 피고 지면 이름이 궁금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여기서 ‘순서’는 꽃들이 피고 지는 자연의 질서를 말하는 것인데, ‘출석부’는 그 순서를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쓴 것이다. 특히 ‘내가 출석을 부르지 않아도 그것들은 올 것이다’는 말에서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꽃의 속성을 단적으로 느낄 수 있다.
셋째, 꽃을 의인화해 친근감을 드러낸다. ‘출석부’라는 말을 사용한 뒤로 ‘이름’ ‘출석’ ‘결석’ 등의 말을 이용하며 ‘꽃’을 마치 인간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특히 ‘땅을 함부로 밟지 못한다’ ‘그것들이 목마를까봐 마음 놓고 어디 여행도 못 할 것이다’ ‘출석할 때마다 내 가슴을 기쁨으로 뛰놀게 했다’는 말에서 꽃에 대한 글쓴이의 애정은 극에 달한다. 이 같은 의인화는 대상에 대한 친근감을 드러내는 데 종종 이용된다는 점을 알아두면 좋다.
☞ 포인트
① 어감(뉘앙스)을 고려해 어휘의 의미를 생각하는 습관을 갖자.② 수필에서 글쓴이가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사람과 대조하는 방법을 사용함을 알아두자.
③ 글쓴이가 자신의 생각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핵심어를 찾고, 그것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④ 대상의 존재에 대한 인식과 그 가치는 ‘이름’을 통해 드러남을 이해하자.
⑤ 대상에 대한 친근감을 표현하기 위해 대상을 의인화하는 경우가 있음을 알아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