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CFO Insight]북쉘프-홀로 미국 향한 9살 꼬마가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 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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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의 생애와 사상 (김형석 著)
1904년의 어느 날, 인천 제물포항. 아홉 살짜리 한 꼬마가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가는 큰 배에 홀로 올라탄다. 다른 가족들과는 이미 며칠 전 평양에서 작별 인사를 했고, 인천까지 함께 내려온 아버지와도 이곳에서 헤어졌다.
멀고 먼 뱃길 끝에 한 달이 지나서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발을 디뎠고, 다시 기차로 갈아타고 끝없이 펼쳐진 평원을 지나 미국 중부 네브래스카주의 작은 마을 카니에 도착해서야 아이의 여정은 끝이 난다.
이 아이가 다시 한국에 돌아오기까지는 22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얼마 전 막 결혼한 아내와 함께였다.
1926년 인천항에 내려 기차로 갈아타고 서울역에 도착한 이들 부부 앞에는 신문사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날 <동아일보>에는 ‘적은 자본으로 식료품 장사를 시작해 수백만 원의 큰 회사를 이룬 유일한 씨, 중국인 부인과 귀국’이라는 기사가 부부의 사진과 함께 큼지막하게 실린다.
이 남자는 바로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박사다. 기사 제목대로 그는 이미 이때 미국에서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의 아내 호미리 여사는 아시아 여성으로는 최초로 미국에서 의사 자격증을 받은 인물이었다. 중국에서도 큰 부호로 꼽히는 집안의 딸이었다. 백화점을 운영하고 있는 가문의 딸이었으니 말이다.
이들 부부가 큰 부와 명예가 보장돼 있는 ‘기회의 땅’ 미국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일본의 식민지배에 시달리던 척박한 한국으로 들어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특히 유일한 박사는 대학생이던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던 독립운동 행사인 ‘한인자유대회’를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런 그가 한국에 돌아온다면 조선총독부와 일본 경찰의 감시와 탄압에 시달릴 거란 건 불 보듯 뻔했는데 말이다.
1971년 세상을 떠난 유일한 박사는 오늘날에도 한국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이다. 그가 1926년 설립한 유한양행은 국내 1위의 제약회사로, 100년에 가까운 역사 동안 줄곧 사회로부터 큰 신뢰를 받아온 기업이다.
그의 이름 뒤에는 언제나 박사라는 호칭이 따라붙는다. 회장이나 대표 같은 직함만으론 뛰어난 기업인이면서 동시에 올곧은 독립운동가이며 큰 교육자였던 그의 삶을 모두 담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연희전문학교(오늘날의 연세대학교)로부터 교수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회사를 차린다. 교수로서 살아가는 것보단 사람들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 기업을 만드는 게 사회에 더 큰 공헌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1926년 6월 20일 유한양행을 설립한다. 처음에는 질 좋은 미국 의약품을 수입해 판매하는 게 유한양행의 주력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몇 년 전 그는 자신이 미국 현지에서 경영하고 있던 '라초이 식품회사'에서 생산하던 숙주나물 통조림의 원료가 되는 녹두를 수입하기 위해 잠시 한국을 찾은 적이 있었다. 먼저 중국에 들린 뒤 한국을 거쳐 간도에 살고 있던 가족을 만나는 여정이었다.
이 여행을 통해 식민지배에 신음하던 조국과 동포들의 비참한 모습을 눈으로 목격한다. 31세 청년 유일한이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던 귀국의 꿈을 실천하기로 결심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미국에 돌아와 모든 재산을 정리하며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대학 시절 친구이자 회사의 공동 창업자인 윌레스 스미스 등 그의 지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그의 결심을 바꿀 수는 없었다.
“나도 너와 같이 행복한 나라의 국민으로 태어났다면 이런 무거운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됐었을 것”이라는 게 그가 자신의 미국인 친구들에게 남긴 말이었다.
아내와 함께 한국 땅을 밟은지 45년이 지난 1971년 3월 11일, 그는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이로부터 한 달 뒤 공개된 그의 유언장은 한국 사회를 뒤흔들며, 장례식 당시보다 더 큰 추모 열기가 피어오르게 만든다.
다음이 그가 세상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손녀 유일린의 대학 졸업 시까지 학자금으로, 나의 주식 배당금 가운데서 1만 달러 정도를 마련하라.”
“영애(딸) 유재라에게는 유한 중·고등학교 구내에 있는 묘소(자신의 묘지) 및 주변 대지 5000평을 상속하되, 이를 유한동산으로 꾸며주기를 바란다. 유한동산에는 결코 울타리 따위는 치지 말 것이며 유한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여, 그 어린 티 없는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보고 느끼게 해 달라.”
“영식(아들) 유선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라.”
“내 소유인 유한양행 주식 14만 941주(1971년 당시 시가 2억2500만원) 전부를 재단법인 <한국사회 및 보육신탁기금>에 기증함으로써 뜻있는 사회사업과 교육 사업에 쓰도록 하라”
[그가 세상을 떠나고 한 달 뒤인 1971년 4월 8일, 유한양행 사장실에서 공개된 유언장]
홍선표 기자 rickey@hankyung.com
멀고 먼 뱃길 끝에 한 달이 지나서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발을 디뎠고, 다시 기차로 갈아타고 끝없이 펼쳐진 평원을 지나 미국 중부 네브래스카주의 작은 마을 카니에 도착해서야 아이의 여정은 끝이 난다.
이 아이가 다시 한국에 돌아오기까지는 22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얼마 전 막 결혼한 아내와 함께였다.
1926년 인천항에 내려 기차로 갈아타고 서울역에 도착한 이들 부부 앞에는 신문사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날 <동아일보>에는 ‘적은 자본으로 식료품 장사를 시작해 수백만 원의 큰 회사를 이룬 유일한 씨, 중국인 부인과 귀국’이라는 기사가 부부의 사진과 함께 큼지막하게 실린다.
이 남자는 바로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박사다. 기사 제목대로 그는 이미 이때 미국에서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의 아내 호미리 여사는 아시아 여성으로는 최초로 미국에서 의사 자격증을 받은 인물이었다. 중국에서도 큰 부호로 꼽히는 집안의 딸이었다. 백화점을 운영하고 있는 가문의 딸이었으니 말이다.
이들 부부가 큰 부와 명예가 보장돼 있는 ‘기회의 땅’ 미국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일본의 식민지배에 시달리던 척박한 한국으로 들어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특히 유일한 박사는 대학생이던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던 독립운동 행사인 ‘한인자유대회’를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런 그가 한국에 돌아온다면 조선총독부와 일본 경찰의 감시와 탄압에 시달릴 거란 건 불 보듯 뻔했는데 말이다.
1971년 세상을 떠난 유일한 박사는 오늘날에도 한국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이다. 그가 1926년 설립한 유한양행은 국내 1위의 제약회사로, 100년에 가까운 역사 동안 줄곧 사회로부터 큰 신뢰를 받아온 기업이다.
그의 이름 뒤에는 언제나 박사라는 호칭이 따라붙는다. 회장이나 대표 같은 직함만으론 뛰어난 기업인이면서 동시에 올곧은 독립운동가이며 큰 교육자였던 그의 삶을 모두 담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연희전문학교(오늘날의 연세대학교)로부터 교수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회사를 차린다. 교수로서 살아가는 것보단 사람들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 기업을 만드는 게 사회에 더 큰 공헌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1926년 6월 20일 유한양행을 설립한다. 처음에는 질 좋은 미국 의약품을 수입해 판매하는 게 유한양행의 주력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몇 년 전 그는 자신이 미국 현지에서 경영하고 있던 '라초이 식품회사'에서 생산하던 숙주나물 통조림의 원료가 되는 녹두를 수입하기 위해 잠시 한국을 찾은 적이 있었다. 먼저 중국에 들린 뒤 한국을 거쳐 간도에 살고 있던 가족을 만나는 여정이었다.
이 여행을 통해 식민지배에 신음하던 조국과 동포들의 비참한 모습을 눈으로 목격한다. 31세 청년 유일한이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던 귀국의 꿈을 실천하기로 결심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미국에 돌아와 모든 재산을 정리하며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대학 시절 친구이자 회사의 공동 창업자인 윌레스 스미스 등 그의 지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그의 결심을 바꿀 수는 없었다.
“나도 너와 같이 행복한 나라의 국민으로 태어났다면 이런 무거운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됐었을 것”이라는 게 그가 자신의 미국인 친구들에게 남긴 말이었다.
아내와 함께 한국 땅을 밟은지 45년이 지난 1971년 3월 11일, 그는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이로부터 한 달 뒤 공개된 그의 유언장은 한국 사회를 뒤흔들며, 장례식 당시보다 더 큰 추모 열기가 피어오르게 만든다.
다음이 그가 세상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손녀 유일린의 대학 졸업 시까지 학자금으로, 나의 주식 배당금 가운데서 1만 달러 정도를 마련하라.”
“영애(딸) 유재라에게는 유한 중·고등학교 구내에 있는 묘소(자신의 묘지) 및 주변 대지 5000평을 상속하되, 이를 유한동산으로 꾸며주기를 바란다. 유한동산에는 결코 울타리 따위는 치지 말 것이며 유한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여, 그 어린 티 없는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보고 느끼게 해 달라.”
“영식(아들) 유선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라.”
“내 소유인 유한양행 주식 14만 941주(1971년 당시 시가 2억2500만원) 전부를 재단법인 <한국사회 및 보육신탁기금>에 기증함으로써 뜻있는 사회사업과 교육 사업에 쓰도록 하라”
[그가 세상을 떠나고 한 달 뒤인 1971년 4월 8일, 유한양행 사장실에서 공개된 유언장]
홍선표 기자 rick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