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WHO)가 백신여권을 도입해 국제여행을 재개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내놨다. 현재 접종 중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의 바이러스 전염 방지 효과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이스라엘, 영국에 이어 유럽연합(EU) 등에서 추진 중인 백신여권 도입에 대해 WHO가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1일 영국 일간지 텔레그라프에 따르면 WHO 국경위험전파관리 책임자인 닝란 왕 박사는 "코로나19 백신의 바이러스 감염 억제 효과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며 "WHO는 국제여행 재개를 위해 백신 접종 증명(백신여권) 도입에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왕 박사는 이날 글로벌 관광회복력 및 위기관리 센터(GTRCMC) 주최로 열린 화상 세미나에서 "여행객은 백신 접종의 우선 대상이 아니다"라며 "여행객에 대한 우선 접종이 이뤄질 경우 백신 공급의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백신 생산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백신여권이 도입돼 여행 목적의 접종 수요가 늘어날 경우, 정작 접종이 필요한 우선 대상자가 소외될 수 있다는 것이다.

카리브해 보건국(CARPHA)의 질병예방 및 통제 디렉터인 리사 인다르 박사도 "모든 백신에 감염 방지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코로나19 백신 효과가 충분히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백신 접종을 이유로 검역을 중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5년 뒤인 20206년 전 세계에 코로나19 집단면역 체계가 구축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GTRCMC 공동 회장인 에드먼드 바틀렛 자메이카 관광부 장관은 "지금 추세대로 백신 접종이 이뤄진다면 세계 인구의 75%가 접종을 마치는 데 5년이 걸린다"며 "개발도상국에는 제한된 물량의 백신이 공급되고 있고 현재까지 단 한 개의 백신을 확보하지 못한 나라도 130개국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백신여권은 현재 덴마크와 스워덴, 아이슬란드가 도입을 결정한 가운데 영국과 스페인, 이스라엘 등이 도입을 검토 중이다. 지난달 26일 유럽연합(EU)도 26개 회원국 정상이 모인 자리에서 역내 백신여권 도입에 합의했다. 하지만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회의 직후 "백신여권 도입의 필요성에는 동의하지만, 백신 접종 증명만으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영국 전 외무장관 출신 이베트 쿠퍼 노동당 의원은 영국 국영방송 BBC와의 인터뷰에서 "정부가 백신여권으로 국민들에게 여름휴가에 대한 잘못된 희망을 주고 있다"며 정부를 맹비난했다. 쿠퍼 의원은 "현재 영국을 찾는 방문객의 단 1%만 호텔 검역시스템을 통해 보호받고 있다"며 "지금은 백신여권 도입보다 변이 바이러스 유입을 막기 위해 공항에서부터 검역을 강화할 때"라고 지적했다.

한편 정부는 2일 백신여권 도입과 관련해 "중앙방역대책본부(방대본)과 중앙사고수습본부(중수본)을 중심으로 관계 부처 간 논의가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윤태호 중수본 방역총괄반장은 "백신접종을 해도 무증상 감염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여전하고, 백신 효능에 대한 데이터도 불충분한 상황"이라며 "(백신여권 도입에 앞서) 전반적으로 실무적인 부분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선우 기자 seonwoo.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