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은 없다. 테크기업만 있다 ...AI날개 단 뱅크오브아메리카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는 지난해 미국 특허청에 모두 722건의 특허를 신청했습니다. BoA 역사상 최고 기록을 달성한 해였죠. 세계 어떤 금융회사에서도 이만큼 특허를 신청한 곳은 없습니다. 지난해 특허로 등록된 발명만 해도 모두 444건이나 됐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미국 전체 특허 신청이 1% 줄어든 상황에서 얻어낸 값진 기록이었습니다. 금융기업이 특허를 출원했다는 건 깜짝 놀랄 일 중 하나입니다. 특허 신청을 분야별로 보면 인공지능(AI)과 데이터 분석 관련 특허가 23%를 차지했습니다. 보안 분야도 20%를 점하고 있고요. BoA의 방향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브라이언 모이니한 CEO는 BoA의 미래를 다음과 같이 예측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겉모습은 대형 은행이지만 사실상 기술 기업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미래입니다. 무엇보다 고객들이 우리를 그쪽으로 옮겨 가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 금융 AI' 가속화

230년의 역사를 가진 미국의 대표적 상업은행 BoA는 지난 10년간 디지털과 AI에 적극 투자해왔습니다. 핀테크 기업들의 위협이 상존하는 등 금융산업 자체의 패러다임 변화가 아날로그 기업 BoA에 끊임없는 변신을 요구했던 겁니다.
은행은 없다. 테크기업만 있다 ...AI날개 단 뱅크오브아메리카
이들이 일찍 간파한 건 데이터의 중요성이었습니다. 과거 은행들은 운용자산 및 관리자산 규모가 클수록 대형 은행으로 간주했습니다. 하지만 디지털과 AI시대에는 데이터의 양과 규모가 그 은행의 비중을 드러냅니다. 데이터가 풍부해 분석거리가 많은 은행이 절대 강자입니다. BoA가 디지털과 AI 관련 특허를 확보하려고 노력한 건 바로 이런 연유에서였습니다.
그 사이 미국은 AI와 핀테크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소비자들은 디지털금융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첵(수표)으로 결제하는 것도 보편화돼 있는 데다, 카드 결제 로그인을 요구하는 등 불편했기 떄문이죠. 은행 지점도 많습니다. 2019년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미국 인구 10만 명당 은행들의 점포수는 30개입니다. 한국 15개의 두 배가량입니다. BoA도 미 전역에 4300개의 소매 금융센터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덮쳤습니다. 미국 은행들은 지점을 휴업하고 다시 열었다가 휴업하는 작업을 반복했습니다. 이용자들은 금융거래를 하기 위해 디지털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미국의 소비자 금융 판도가 확 바뀌어 버린 겁니다.

킬러앱 ' 에리카' 진가 발휘

한발 앞서 디지털 전환을 실행해온 BoA의 핵심 역량이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BoA가 지난해 판매한 금융 상품과 대출은 50%가 온라인을 경유했습니다. 2019년의 27%에서 거의 두 배로 늘어난 셈입니다. 무엇보다 모바일 앱인 ‘에리카’의 사용이 획기적으로 늘었습니다. 에리카를 쓰는 고객은 2020년 말 기준 전년 대비 67% 증가한 1700만 명이나 됐습니다. 고객 대응도 전년 대비 두 배인 하루 40만으로 껑충 뛰었습니다.
은행은 없다. 테크기업만 있다 ...AI날개 단 뱅크오브아메리카
에리카는 2018년 BoA가 애플의 모바일 음성인식 비서 시리(Siri)를 본떠 만든 업계 최초의 금융거래 앱입니다. 이 앱을 활용하면 대화형으로 손쉽게 금융 업무를 볼 수 있습니다. 계좌 조회나 송금 등의 단순 업무에서 대출 연장, 이자 상환 등 상담원이 전담하던 업무까지 모두 다룰 수 있습니다. 계좌의 상황 조회나 월별 각종 수수료 확인 및 송금, 각종 청구서 알림 설정 등도 할 수 있습니다. 투자자문까지 해줍니다. 최근에는 재난지원금 문의나 대출 이자 연기 등이 인기 분야라고 합니다.
에리카는 고객 눈높이 서비스에 주력하지만 그만큼 빅데이터를 모으는 부수입도 올립니다. 작년 한 해 동안 새로 에리카에 가입한 고객의 25%가 만 55세 이상의 베이비 붐 세대였습니다. 이들은 BoA의 핵심 고객층이면서도 디지털뱅킹을 그동안 하지 않아 은행에선 데이터를 많이 확보하지 못한 세대였습니다. 이들이 에리카를 쓰면서 그만큼 귀중한 데이터를 확보하게 됐습니다. 또한 에리카를 통해 미국의 은행공동 결제 및 P2P(개인 대 개인) 송금앱인 ‘젤레(Zelle)’에 접속이 쉬워졌습니다. 가령 다른 은행 계좌에 수백달러를 송금하려면 에리카를 통해 젤레에 접속해서 보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BoA는 고객들의 데이터를 수집합니다. BoA가 갖고 있는 특허에서 음성인식이나 네트워크 트래픽 분석 등 모바일 가상비서(챗봇) 에리카와 관련한 특허들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부동산 거래·투자자문에 활용

브라이언 모이니한 CEO는 지난해 12월 9일 미국인들의 지출이 오히려 지난해보다 증가하고 있다며 놀라운 수준의 재정 회복력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통계는 물론 BoA가 갖고 있는 계좌들의 현금흐름 분석을 통해서였습니다. 미국의 어떤 경제 통계 조사기관보다 정확하고 살아있는 경제 데이터를 통해 알아낸 것이죠. BoA는 그만큼 데이터 분석과 활용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BoA가 금융회사의 주요 사업이라고 할 모기지(부동산담보대출)를 쉽게 할 수 있는 시스템도 이런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지난해 BoA에서 이뤄진 부동산 대출의 68%가 디지털로 이뤄졌습니다. 2019년 36%의 두 배에 가깝습니다. 고객이 은행의 모바일 앱 또는 온라인에서 모기지를 신청하면 AI를 활용하는 시스템 덕분입니다. BoA는 대출 전문가와 소통해서 대출 조건을 맞춤형태로 만들어 잠재적으로 하루 이내에 조건부 승인을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데이터를 활용해 개발한 또 다른 대표적 아이템은 IPO(기업공개)의 적정 가치를 식별하는 거래예측시스템 ‘프리암(PRIAM)’입니다. 기존 IPO에서 투자자들은 주로 그 기업의 성장성과 재무실적 등을 중심으로 분석을 합니다. 하지만 프리암은 그동안 IPO에 투자한 투자자들의 투자 동향 데이터 등을 분석하고 가격 및 수량 등의 수요를 예측합니다. 이를 토대로 투자자문을 하고 있습니다. BoA가 갖고 있는 방대한 데이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뿐 아니라 금융사기를 모니터링하고 보안을 강화하는 데서도 AI를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6000만명 자문하는 맞춤형 AI

BoA가 내세우는 건 새로운 차원의 ‘유저 프렌들리(user friendly)’ 전략입니다. AI를 충분히 활용해 사용자의 눈높이에 맞게 편리하게 다가가는 친숙한 은행으로 거듭나자는 겁니다. 우선 음성비서 에리카의 기능을 확장해 6000만 개의 개인 맞춤 킬러 앱을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현재 에리카는 고객 개개인의 지불능력과 사용 출처 등을 분석해 어떻게 절약하고 저축해야 하는지, 그리고 펀드에서 어디에 투자해야 할지 등에 대해 안내합니다. BoA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인생 재무 설계를 상담하고 조언하는 라이프 플랜(Life plan)을 지난해 내놓았습니다. 주택구입이나 육아 등의 목표를 정하고 이를 성취하는 과정을 계속 모니터링하는 도구입니다.
과거에 은행은 고객을 유치하고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격과 속도 접근성을 중시했지만 이제는 개인 맞춤화와 금융 이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며 각종 인생 설계 상담까지 응해주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핵심에는 인공지능(AI)이 있습니다.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