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은 어떤 곡일까요. 베토벤, 모차르트, 쇼팽 등의 작품이 머릿속을 스치는데요. 과연 이 중에 정답이 있을까요. 질문 하나를 더 드리겠습니다. 인공지능(AI)이 서양 음악가 중 가장 혁신적인 인물을 골랐는데요. 누구였을까요.

두 질문의 주인공은 모두 러시아 출신의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입니다. KBS 클래식FM 설문조사 결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 1위에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올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익숙하게 알고 즐기는 베토벤의 '교향곡 5번(운명)'과 같은 작품이 아니라는 점이 놀라운데요. 처음엔 이 작품이 어떤 곡인지 잘 떠오르지 않을 수 있지만, 들어보면 자주 접했던 곡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러시아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이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 등 다양한 작품에 나왔었고, 국내외 많은 아티스트들이 이 곡을 즐겨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3월 30일~4월 22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2021 교향악축제'에서도 KBS교향악단,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등 5개 단체가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을 선보입니다.

AI가 인정한 혁신적인 음악가도 라흐마니노프라는 점이 호기심을 자극하는데요. 카이스트(KAIST) 문화기술대학원에서 서양 클래식 작곡가 19명을 대상으로 혁신성을 조사했는데, 라흐마니노프가 단연 선두로 나타났다고 합니다.1700~1900년 발표된 900여곡의 악보에서 음정을 추출해 유사성과 차이점을 비교했는데요. 해당 작곡가의 곡과 이미 그 전에 발표된 다른 작곡가의 곡이 얼마나 다른지 비율을 따져봤죠. 그랬더니 라흐마니노프가 1위를 차지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만든 음정은 거의 따라하지 않고 자신만의 새로운 음악 세계를 구축한 것이죠.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은?[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이런 기록들을 보니, 주인공인 라흐마니노프의 삶이 더욱 궁금해 지지 않으십니까. 차이코프스키와 함께 러시아 낭만주의의 대표 음악가로 꼽히는 그의 인생은 매우 치열하고 격정적이었습니다. 그의 삶을 그린 뮤지컬 '라흐마니노프'가 나오기도 했죠. 그의 음악에도 높은 인생의 파고와 깊은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유복한 유년 시절을 지냈습니다. 근위대 대장인 아버지와 장군의 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요. 음악을 사랑하는 가족들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즐기며 자랐죠. 그러나 라흐마니노프가 9살이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사업을 하다 재산 전부를 잃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오랜 시간 학업을 멀리하고 방황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다 14살에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게 됐고,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았는데요. 10년 후인 24세가 되던 해 다시 폭풍 같은 방황을 하게 됩니다. 그가 이때 쓴 '교향곡 1번'이 엄청난 혹평에 시달렸기 때문입니다. 이 곡의 초연 지휘를 맡았던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가 단원들을 제대로 연습시키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공연 당일 술에 취해 있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참담하게 끝나버린 초연으로 인해 라흐마니노프는 3년 동안 음악 활동을 중단합니다. 그러다 심리학자 니콜라이 달 박사를 만나 어렵게 우울증을 극복합니다.

꽤 기나긴 방황을 끝내고 마침내 만들어낸 작품이 '피아노 협주곡 2번'입니다. 라흐마니노프 스스로도 이 곡에 대해 "오직 코끼리 같은 피아니스트만이 제대로 연주할 수 있다"고 했는데요. 그만큼 연주 내내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엄한 스케일, 대담하고 변화무쌍한 선율. 이 안엔 그의 깊은 고뇌는 물론 새롭게 품게 된 희망과 자신감까지 담겨 있습니다. 지독한 좌절감에서 벗어나 삶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 음악에 녹여낸 겁니다.

이곡 뿐 아니라 그의 '피아노 협주곡 3번'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데요. 이 작품도 피아니스트들에겐 연주하기 까다로운 곡이자 도전하고 싶은 곡으로 꼽힙니다. 영화 '샤인'에서 주인공 헬프갓은 이 작품을 신들린 듯 연주한 후 정신분열증을 앓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 곡엔 3만 개에 이르는 음표가 나오는데요. 작품 길이도 40분에 달합니다. 끝까지 완성도 높은 연주를 선보일 수 있는 막강한 체력과 정교한 테크닉 까지 필요합니다. 그래서 정말 어려운 곡이지만 많은 연주자들이 꾸준히 도전하고 있습니다. 라흐마니노프의 절친이었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도 75세의 나이에 생애 마지막으로 이 곡을 연주했죠.

라흐마니노프가 이런 곡들을 만들 수 있었고, 스스로도 완벽하게 이 작품들을 연주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의 손에 있습니다. 그의 손은 매우 크고 길었다고 하는데요. 엄지 손가락으로 '도'를 짚고 새끼 손가락으로는 다음 옥타브의 '라'까지 뻗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다음 옥타브의 '도'나 '레'까지만 닿는 보통 사람들에 비해 4~5개 음을 더 짚을 수 있었던 것이죠. 손만큼이나 키도 컸는데요.198㎝의 거구였다고도 하네요.

큰 몸집과 커다란 손. 그런데 타고난 신체 조건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라흐마니노프가 70세에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부인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잠옷을 입은 채 밤새 연습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매일 2~3시간씩 연습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만 잠을 잤죠." 라흐마니노프 역시 마지막까지 음악 여정을 더 오래 이어가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습니다. "음악은 일생동안 하기에 충분하지만, 인생은 음악을 하기에 너무 짧다."


중국 출신의 피아니스트 유자 왕이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