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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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슈밋 전 구글 회장 등 정보기술(IT) 거물들이 참여하고 있는 미국 정부기관 ‘인공지능에 관한 국가안보위원회(NSCAI)’가 최근 756쪽 분량의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NSCAI는 “안보의 핵심인 반도체 분야에서 지배력을 상실하기 직전”이라며 “미국에 반도체 설계와 제조 기반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 상원은 곧바로 300억달러 규모의 반도체산업 지원 법안 마련에 들어갔다.

글로벌 반도체산업이 격변기를 맞고 있다. 반도체 패권을 향한 경쟁이 기업 단위 수준을 넘어 국가 대항전 성격으로 번졌다. 충격파는 곧 한국 반도체산업에 불어닥칠 전망이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도 반도체 자립에 속도를 내고 있다. 애플은 최근 독일에 10억유로를 투자해 반도체 자체 설계·개발 거점으로 키우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29년 연속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 ‘D램 슈퍼사이클’과 같은 장밋빛 수사에 취해 있다간 반도체산업의 기반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EU도 "반도체 자급자족"…국가대항전 된 반도체산업
中 "칼 가는 심정으로 반도체 매진"

‘반도체 전쟁’을 선포한 곳은 미국만이 아니다. 유럽연합(EU)도 2030년까지 180조원을 투입해 유럽 내 반도체 생산량을 세계의 20% 수준까지 늘리기로 했다. 현재 10% 안팎인 생산 비중을 두 배로 끌어올리겠다는 선언이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코로나19 팬데믹은 EU에 디지털 기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줬다”며 “2020년대를 유럽 디지털 10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미국의 견제로 주춤하던 중국도 최근 ‘3세대 반도체 육성’을 내걸고 반도체 굴기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올해 양회에서 최종 승인되는 14차 5개년 계획에도 반도체 육성 전략이 포함됐다. 리커창 총리는 지난 4일 양회 정부 업무보고에서 “10년 동안 단 하나의 칼을 가는 심정으로 8대 신산업과 7대 과학기술에 매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은 약 20%다. 지난해 반도체 수입액은 약 3500억달러에 이른다.

한국 반도체산업이 경쟁력을 잃으면 국내 경제는 ‘바람 앞의 등불’ 상황에 놓이게 될 전망이다. 반도체는 국내에서 제조해 수출하는 품목으로, 물건을 팔 때마다 한국으로 달러가 들어온다. 코로나19가 확산된 지난해 원화 가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됐던 것도 반도체업체들이 ‘환율 방파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2020년 한국 전체 수출(993억달러)의 19.3%를 반도체가 담당했다.

고용 시장에서도 반도체산업의 비중이 상당하다. 삼성전자 DS 부문과 SK하이닉스가 작년 말 기준 고용하고 있는 국내 직원만 8만8000여 명에 달한다. 반도체 장비와 소재 업체까지 고려한 반도체업계 종사자는 수십만 명에 이른다.

경종민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부 명예교수는 “자국 반도체 육성과 빅테크기업의 자립 움직임은 한국 반도체기업에 위협 요인이 될 것”이라며 “반도체에 대한 지원을 획기적으로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정수/송형석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