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동백과 목련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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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冬栢)은 혹한 속에서 꽃망울을 터뜨린다. 추울 때 피는 꽃이어서인지 꽃잎이 두껍다. 그 속에 향기 대신 꿀을 잔뜩 머금고 있다. 이 시기엔 곤충이 많이 없어 수정을 새에게 맡긴다. 동백꽃의 꿀을 가장 좋아하는 새가 동박새다.
동백꽃은 지금이 절정이다. 경남 통영 장사도에서는 10만 그루 동백이 봄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섬 모양이 ‘마음 심(心)’자를 닮은 거제 지심도의 동백원시림, 여수 오동도의 동백숲도 빨갛게 물들었다. 전남 강진 백련사의 1500그루 동백숲은 붉은 꽃터널로 변했다.
전북 고창 선운사 동백꽃은 가장 늦게 핀다. 동백나무 자생지의 북방한계선에 있어 4월 중순에야 느릿느릿 망울을 내민다. 동백이 자라지 않는 강원도에서는 생강나무를 동백이라고 부른다. 김유정 단편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노란 동백꽃’의 ‘알싸한’ 향기와 정선아리랑 가사 중의 ‘싸리골 올동백’도 동백이 아니라 생강나무를 가리킨다.
동백꽃은 하늘을 보지 않고 옆이나 아래를 향해 다소곳이 벙근다. 열정적인 색깔과 달리 자태가 겸손하다. 꽃이 질 때는 바람에 한 잎씩 날리지 않고 온몸이 통째로 떨어진다. 시들기 전에 떨어진 동백 꽃송이는 바닥에서도 여전히 붉게 빛난다. 그래서 ‘두 번 피는 꽃’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목련(木蓮)은 동백의 뒤를 잇는 4월의 꽃이다. 꽃 모양이 연꽃을 닮아서 목련, 은은한 향기가 난초향 같다고 해서 목란(木蘭)으로 불린다. 목련꽃을 자세히 보면 봉오리가 북쪽을 보고 있다. 대부분의 꽃이 해바라기하듯 피는 것과 다르다. 이는 따뜻한 햇살을 받는 꽃잎의 엉덩이 쪽이 먼저 부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향화(北向花)라고도 한다.
목련 꽃잎은 동백보다 커서 한 그루가 꽃을 다 피우면 주변이 온통 환해진다. 등불 같은 이 꽃을 볼 수 있는 기간은 불과 열흘밖에 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다. 그러나 모든 꽃은 피어날 때 이미 질 것을 알고 있다. 꽃이 죽어야 비로소 그 자리에 열매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꽃의 절정은 낙화(落花) 직전이다. 필 때보다 질 때 더 아름다운 생멸(生滅)의 미학이랄까. 미당 서정주가 ‘더없이 아름다운/ 꽃이 질 때는/ 두견새들의 울음소리가/ 바다같이 바다같이/ 깊어만 가느니라’고 노래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 번뿐인 우리 삶과 세상사 원리도 이와 같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동백꽃은 지금이 절정이다. 경남 통영 장사도에서는 10만 그루 동백이 봄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섬 모양이 ‘마음 심(心)’자를 닮은 거제 지심도의 동백원시림, 여수 오동도의 동백숲도 빨갛게 물들었다. 전남 강진 백련사의 1500그루 동백숲은 붉은 꽃터널로 변했다.
전북 고창 선운사 동백꽃은 가장 늦게 핀다. 동백나무 자생지의 북방한계선에 있어 4월 중순에야 느릿느릿 망울을 내민다. 동백이 자라지 않는 강원도에서는 생강나무를 동백이라고 부른다. 김유정 단편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노란 동백꽃’의 ‘알싸한’ 향기와 정선아리랑 가사 중의 ‘싸리골 올동백’도 동백이 아니라 생강나무를 가리킨다.
동백꽃은 하늘을 보지 않고 옆이나 아래를 향해 다소곳이 벙근다. 열정적인 색깔과 달리 자태가 겸손하다. 꽃이 질 때는 바람에 한 잎씩 날리지 않고 온몸이 통째로 떨어진다. 시들기 전에 떨어진 동백 꽃송이는 바닥에서도 여전히 붉게 빛난다. 그래서 ‘두 번 피는 꽃’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목련(木蓮)은 동백의 뒤를 잇는 4월의 꽃이다. 꽃 모양이 연꽃을 닮아서 목련, 은은한 향기가 난초향 같다고 해서 목란(木蘭)으로 불린다. 목련꽃을 자세히 보면 봉오리가 북쪽을 보고 있다. 대부분의 꽃이 해바라기하듯 피는 것과 다르다. 이는 따뜻한 햇살을 받는 꽃잎의 엉덩이 쪽이 먼저 부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향화(北向花)라고도 한다.
목련 꽃잎은 동백보다 커서 한 그루가 꽃을 다 피우면 주변이 온통 환해진다. 등불 같은 이 꽃을 볼 수 있는 기간은 불과 열흘밖에 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다. 그러나 모든 꽃은 피어날 때 이미 질 것을 알고 있다. 꽃이 죽어야 비로소 그 자리에 열매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꽃의 절정은 낙화(落花) 직전이다. 필 때보다 질 때 더 아름다운 생멸(生滅)의 미학이랄까. 미당 서정주가 ‘더없이 아름다운/ 꽃이 질 때는/ 두견새들의 울음소리가/ 바다같이 바다같이/ 깊어만 가느니라’고 노래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 번뿐인 우리 삶과 세상사 원리도 이와 같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