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들의 조우 속에서 창조성을 떠올리자

지난 4월에 중소기업체 몇 군데를 방문할 때 수출로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는 의료벤처기업의 신 사장(40대 초반)을 만날 수 있었다. 설립한지 5년 정도 됐고 종업원은 50명 내외다. 주된 생산품은 막힌 혈관을 넓혀주는 스텐스(stent)를 개발․생산한다. 막힌 혈관부위까지 스텐스를 삽입시키면 혈관이 확장되어 혈액이 원활하게 순환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으로 매우 가는 것부터 기도, 식도 등에 사용하는 굵은 것도 있다. 신 사장이 개발한 이 상품이 국내 병원뿐 아니라 해외 30여 개국으로 수출되고 있으며 작년 매출액은 4백억 원대, 순이익도 60억 원대에 달하고 있다. 엄지손가락보다 약간 굵고 10센티미터 전후되는 것의 가격이 수십만 원씩 나가는 고부가가치제품이다.

신 사장이 자랑스러운 것은 그동안 수입품에만 의존하던 고가품을 국산화시킴으로서 환자들의 부담을 많이 덜어주고 국가경제에 보탬이 되게 함은 물론 이 분야에서 국산기술의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점이다.

나는 이런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는 신 사장의 창업동기, 기술력 등에 관심이 생겨서 여러 가지를 물어봤다. 신 사장은 임학과(林學科)를 졸업하고 공무원생활을 잠시 했다. 얼마 후 공무원을 그만두고 친구와 함께 주물공장을 차려 이런저런 것들을 만들어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주물공장 경영이 원활치 않아 얼마 후 공장을 정리하고 다시 잡은 직장은 무역회사였는데, 그곳에서는 의료용품 수입업무를 담당했다고 한다.

신 사장도 자신이 취급했던 스텐스가 수요가 많고 가격이 비싸다는 것을 그때에 알게 되었다는데, 여기에서부터 그의 호기심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그는 수입되는 스텐스를 보면서 이것을 국산화 시킨다면 여러모로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으며, 주물공장에서 일했던 과거경험을 살려가면서 스텐스를 직접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니 어느 정도 모양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즈음 이 분야의 전문의사를 만나게 되었고, 두 사람은 스텐스의 국산화 개발이라는 대의에 의기투합하여 기술과 정보를 주고받으며 실험에 실험을 거듭하면서 더 정교한 제품을 만들어 갈 수 있었고 드디어 창업에 이를 수 있었다.

신 사장의 직업경로가 임학과 졸업 → 공무원 생활 → 주물공장 운영 → 무역회사 직원으로 이어진 것을 볼 때 상호연결성이 없는 단절된 경력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대학졸업 후 직업적 방황을 상당히 많이 한 것으로도 보인다.


경력의 발전을 ‘어떤 조직 내에서 또는 직종 내에서 거치는 이동경로’라고 한 동일성 개념에 맞지 않고, 또 ‘어떤 직무에서 일련의 직무경험을 쌓고 승진하는 것’이라는 진급개념에도 맞지 않으며, 또한 ‘어떤 한 직업분야와 밀접하게 관련된 인접분야로 옮겨가는 것’이라는 안정성 개념과도 부합되지 않는 비일관적, 비연속적이어서 경력이기보다는 경험들이었다.

이렇게 판이하게 다른 신사장의 경험이 결과적으로 좋은 성과를 가져왔다는 데에서 의미 있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즉 누구에게나 “버릴 경험이나 지식은 없으며 각자 체험한 독특한(unigue) 경험들은 다음 단계에서 또는 언젠가는 반드시 밑거름이 된다.”는 선배들의 말을 확인할 수 있다. 신 사장의 예를 보면,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두 가지의 경험이 합쳐져서 빛나는 결과를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즉 주물공장을 운영하면서 여러 가지를 직접 만들어 보았던 경험과 오퍼상에서 취급했던 스텐스에 관한 호기심이 결합되었던 것이다.

만일 신 사장에게 주물공장 경험이 없었다면 비싸게 수입되는 스텐스를 보고도 ‘만들어 볼’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며, 또한 오퍼상에서 의료용품을 담당하지 않았다면 스텐스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직업적 방랑을 하던 그에게 주물공장과 스텐스라는 두 사상(事象)의 조우(遭遇)는 과연 ‘우연’이었을까? ‘천우신조’였을까?

우리는 어떤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했어도 여의치 않으면 지적(知的) 좌절과 정서적 곤경에 빠져 방황하고 고민한다. 그러던 중에 그때까지는 서로 관계가 없었던 어떤 경험과 또 다른 경험이 어느 한 순간의 관찰에서 서로 관계를 맺게 되는 순간적 신호를 얻어내게 된다. 그러면 그 동안 모호했던 생각이 적절하고 우아한 개념의 형태로 머리 속에 번쩍이게 되는 것이다. 바로 아르키메데스가 몰입의 경지에서 발견하고 외쳤던 ‘유레카’ 같은 이연현상(二聯現狀)이다.

우리는 어른들로부터 ‘재주 많은 놈이 빌어먹는다’는 말도 들어왔고 반면에 ‘잡다한 지식과 다양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 쓸모 있다’는 말도 들어왔다. 앞의 말은 아마도 자기 재능을 믿고 이것저것 손대보면서 확실한 자기주특기를 갖지 못한 것을 빗대어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뒤의 말은 깊이는 없으되 여러 방면을 두루 아는 멀티플레이어 같은 사람이 쓸모 있다는 의미로 생각된다.

신 사장을 만나기 전까지 만해도 그 말들을 개념적 교훈 정도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버릴 경험은 하나도 없으며 언젠가 반드시 쓸모가 생기고, 그리고 우연히 마주치는 경험들의 조우 속에서 창의적인 생각이나 손재주를 발휘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실패의 경험은 곧 성공을 위한 과정이라는 것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 사장의 직업적 방황은 경력관리 측면에서 보면 분명 실패한 경로였으나 다양한 경험 때문에 큰일을 해낼 수 있었던 점에서는 실패경험도 과정에 불과했다.

훗날 듣는 기업의 성공담은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일이 끝난 후의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도 신 사장의 이야기를 성공담 정도로 즐기지만 말자. 목표한 결과가 나타나기 전까지 연구개발자나 경영자는 지속되는 불확실성과 싸워야 한다. 확실하고 완전한 보장이란 없는 곳, 불확실성이라는 안개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예상해야 하는 힘든 곳, 바로 경영현장이며 특히 벤처기업들이다. 이곳이 창조의 현장이다. 그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