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때때로 나는 엎드려 울었다. 그리고 갚을 길도 없는 큰 빚을 지고 도망 다니는 사람처럼 항상 불안하고 외로웠다. 좀처럼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모아 놓은 자료만 어지럽게 쌓아둔채 핑계만 있으면 안 써보려고 일부러 한눈을 팔던 처음과 달리 거의 안타까운 심정으로 쓰기 시작한 이야기 「혼불」은 드디어 나도 어쩌지 못한 불길로 나를 사로잡고 말았다.”(최명희 작가).

지난 봄에 벌써 끝냈어야 할 「경력개발과 취업전략」책의 원고를 미루고 미룬 게으름의 죄 값은 너무 컸다. 무던히도 더웠던 지난 여름 삼복중에도 주말이면 골방에 틀어박혀 키보드를 두들겨대는 형벌아닌 형벌을 받아야 했고, 며칠 받은 여름휴가도 “더운데 밖에 나가면 고생이지~~ 안 그래?”라는 속보이는 말을 모를리 없는 마누라의 하해와 같은 관용으로 억지 동의를 얻어내고 그야말로 ‘방콕’을 하며 마무리를 했다.

가끔 시원한 물이나 과일을 공급해주는 마누라가 고마워서 간단한 애교도 부려보지만 “휴가를 이 모양으로 만들기냐?” “휴가를 당신 뒷통수만 보고 있게 만드냐?”라는 눈화살이 곧 등 에 꽂힐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9월부터 쓸 2학기 교재라는 출판사의 닦달이 없었다면, 아마 더 게으름을 피워 언제 탈고를 했을지 모를 책이 결국 나오게 되었다.

이런 작업을 핑계로 한국경제신문 칼럼을 한 동안 미뤄온 책임을 앞으로 독자들께 어떻게 갚아나가야 할지 걱정이다. 이것은 뭔가 핑계거리로 정당화시켜 나의 게으름을 합리화 하려는 못된 버릇의 결과이다.



나는 글 쓰는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하지만, 글 쓰는 분들의 속마음을 그대로 표현해준 서두의 글귀를 혼불문학관에서 발견하고는 어쩌면 저렇게도 잘 표현했을까 감탄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남원 외곽 사매면이란 곳에 동아일보 창간 60주년기념 장편소설 공모전에 당선되어 1988년부터 장장 7년2개 월동안 동아일보에 연재되어 국민들의 심금을 울렸던 「혼불」과 최명희 작가를 기념하는 혼불문학관이 있다. 「혼불」은 많은 사람들이 박경리의 「토지」와 비교해 설명하곤 할 정도로 대작이라 평하고 있는 걸작이다.

바로 그런 대작의 작가도 나와 같은 마음을 느끼곤 했었다니, 뭔가 나의 나태함을 위안받기 보다는 게으름에 울려준 경종의 의미가 더 크다. 필자가 남원에서 생활한지 1년 반, 혼불문학관은 때론 말도 안 되는 게으른 핑계의 정당성을 얻고 오는 곳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채찍처럼 각성제주사를 맞듯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하는 때가 더 많은 곳이었다.

나에게 지난여름은 “무덥고 긴 여름”이 분명했다. 한편, 오랜 시절 겪어 왔던 여름을 생각해보면서 혹시 나는 “혹서기 생산성이 높은 여름동이 인가?” 라는 괴상한 질문을 만들어 봤다. 그 답도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풀어봤다.

가까운 시기에는 그동안 냈던 몇 권의 책들이 주로 여름에 탈고됐던 일, 또 멀리는 신병훈련 역시 좋은 시절을 쏙빼고 여름에 소금물 마셔가며 훈련 받던 기억, 그리고 20대 후반 신입사원시절에는 여러 기관에서 관리하던 수백 권의 국가기술자격취득자등록부를 인수받아 땀을 무진장 많이 흘리며 온 종일 창고에서 정리 작업을 했던 일도 7,8월 내내였다.

그래서 나에게 여름에 일하는 DNA가 형성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비교적 여름에 중요한 일이 많이 생겼고 그 일들을 무난히 해낸 성공경험이 자기효능감을 만들어 주어 여름에 일하는 것이 겁나지 않다는 답에 이른다.

이러한 여름동이 유전자와 혼불의 채찍과 각성제는 어느 해 보다도 뜨거웠던 올해 여름 안에서 하나의 결실을 맺게 만들어주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결과도 늘 2% 부족한 마음이다. 새로 나온 책을 받고 책장을 넘겨보면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나는 출판사에서 보내온 신간 표지에 ‘교정용’이라고 크게 써버리는 버릇이 있다.

좀 더 알차게 쓰지 못한 내용은 바로 표시를 하면서 2% 부족한 마음을 어떻게든 갚으려 한다. 많이 부족한 저자로서 독자와 세상에 대한 부끄러움도 크다. 이렇게 내가 부족함을 느낄 때면, 혼불은 다시 채찍을 든다.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다.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나가는 것이다.”( 최명희 작가).

미루기와 핑계로 익숙한 곳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혼불을 마음속에 품어 온 마음을 뜨겁게 기울여 모든 일에 임하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