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일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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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일학년
아버지 손을 잡고 봉화산을 넘어 초등학고에 갔다
한 살이 모자라니 내년에 올라고 해서 안타까워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들어가지 전에 한글을 모두 깨치고
군대에 간 형의 편지를 부모님께 읽어드리고
부모 대신 답장을 쓰곤 하여 9월생인 나를 데리고
아버지가 입학이 가능하냐고 물어보러 학교를 찾아가신 거였다
다음해 나도 드디어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때는 국민학교라고 불렀다
상봉역, 중화역, 먹골역 사이의 서울 중랑구 구석에 있는 <중화초등학교>는
1963년도에 서울로 편입이 되었으니 그 당시는
지금의 시골 폐교 같은 단층건물 한동이 달그라니 있는 시골학교였다
집에서 학교를 가려면 봄 여름에는 봉화산을 넘어 다녔다
말이 3월이지 찬바람이 씽씽 부는 산을 넘어야 했다 (그때 3월은 추웠다)
그때에는 초등학교 일학년은 왼쪽 가슴에 콧수건을 매달게 되어 있었다
너나 할것없이 모두들 누렁 콧물을 훌쩍이던 시절이었다
얼굴을 꾀제제하고 머리칼은 더러 기계충이 먹어 움푹움푹 패이고
목에는 때국물이 주르르 흐르는
지금 볼 때 거지 중에 상거지꼴이었다
그래도 신이 났다
새로 보는 동무들과 어울려 병아리들처럼 삐약거렸다
일어나 앉아를 얼마나 했는지 아직도 그 기억이 난다
새로 받은 책상이 신기했다
가난한 시절 더 가난한 시골이라 자기 책상이 있는 아이들이 거의 없었다
그때 책상과 걸상은 두명이 함께 앉게 만들어졌다
몰론 나중에는 서로 자기 책상 침범하지 말라고 책상 가운데 줄을 긋기도 했다
입학해서는 주로 일어나 앉아와, 앞으로 나란히 열중쉬어, 차려를 배웠고 노래를 배웠다
그때 처음 부르던 노래가 생각난다
< 나리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병아리떼 종종종 봄나들이 갑니다 >
우리 형뻘 되는 학년들의 이야기로는 더 옛날에는 일곱 살 넘어서도 입학을 했단다
열 살짜리도 있어서 동창생이라 해도 나이가 들쭉날쭉이랬다
그때에는 명찰 하나를 더 달았는데 불조심강조주간, 식목일주간 등등 무슨 행사나
강조주간을 적은 종이를 접어서 비닐에 넣어 달고 다녔다. 물론 학교앞 문방구에서 팔았다.
학교 앞은 불량식품장사꾼들로 가득했다
주전부리와 학용품등을 팔았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그때 연필은 나무질도 딱딱하고 옹이가 있고
연필심은 잘 부러지거나 너무 딱딱하여 글씨가 안 써지고 종이를 잘 찢어먹었다
그래서 학교 앞에는 늘 연필장사가 있었다.
그 장사꾼은 연필을 깎아 나무판에 콱콱 던져 꽂으면서
안 부러지는 연필이라고 선전을 했다.
그때 처음 맛본 것이 달고나 또는 뽑기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용돈을 거의 주지 않아 한달에 한두번 사 먹으면 행복한 시절이었다
당시에 유행했던 노래가 떠오른다
일학년은 누구나 들었던 짓꿎은 노래이다
<일학년 딱지 코딱지 일전 줄게 때려부셔라>
그 나이쯤 되면 앞니들이 많이 빠졌다
그러면 또 놀려댔다
<앞니빠진 갈가지 우물가에 가지마라 붕어새끼 놀란다>
그 시절에는 아주 잘사는 집안에서나 등에 메는 가죽가방을 사주었고
하얀 운동화도 사주었다
대부분은 검정고무신에 꿰맨 옷에 책보였다
봄 여름에는 산을 넘어다녔기에 힘은 들어도 40여분이면 학교에 오갔는데
가을에는 과수원의 배를 따먹는다고 철조망으로 막고 못다니게 하여
산을 빙 돌아 학교에 가려면 한시간은 족히 넘었다
책가방도 없어서 보자기에 책을 둘둘 말아 어께에 둘러메고 다녔다
입학식이라고 처음 사주신 고르뗑 옷이 너무 좋아 폴짝폴짝 뒤던 생각이 난다
달아준 손수건에 닦지 않고 고르뗑 소매로 콧물을 슥슥 닦아
고르뗑 옷 소매가 반들반들하였다
가능하다면 정말 가능하다면 그 때 그 일학년 시절로 다시 돌아가도록
눈물나도록 그립고 정겨운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