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류 달 영 선생님 영전에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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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류 달 영 선생님 영전에 올립니다.
류 달 영 선생님.
93년을 사시면서 너무 많은 일을 하시어 그 업적을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류 달 영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3년 전, 신문기사를 통해 뵙게 되었으며, 당시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에 감동을 받아, 가는 데마다 선생님의 말씀을 전하며 “이 시대에 다시 뵐 수 없는 어른” 한 분을 지면(紙面)이나마 통해 알고 있다는 것으로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살아 생전에 꼭 한번 뵙고 싶었고, 여의도를 갈 때마다 망설였지만, 제 모습이 너무 초라하여 늘 미루며 살아 왔는데, 지금 얼마나 후회를 하는지 모릅니다.
46년부터 서울대 농대 교수로 재직하시면서, 농민신문을 창간하시고, 한국의 보이스카우트를 창단하시고, 나라 꽃 심기에 앞장서 “한국무궁화연구회”를 창립하시고,
농학교수는 직접 농사를 지어야 한다며 60년대 초부터 수원에 “평화농장”을 만들어 놓으셨다가 고속도로 편입에 따른 토지보상비를 받아서 “성천문화재단”을 만들어 문화활동을 펼치시고, 상록수의 주인공 최 용 신과 농촌계몽운동을 펼치신 선생님의 업적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수필집 “눈 속에 잎피는 나무”, “외롭지 않은 나그네 길”, “자연과 사랑과 인생”, “류 달 영 인생론 7권” 등을 집필하시는 동안 눈이 어두워지고 손목이 아프셨을텐데,
그 “멈추지 않는 열정과 애국심에 대한 갈증”은 아직도 다 풀어 놓지 못하셨으리라 생각하니, 어르신네 같은 분은 100년을 더 사셨어야 하는 게 아닌가 투정이라도 부려 보고 싶을 뿐입니다.
쓰러진 국가를 재건하는데, 그토록 많은 일을 하실 수 있는 인간이 한 국가에 존재할 수 있었다는 건, 그 민족의 행운이요 기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일제시대 이전에 태어 나셔서, 36년간의 일제 통치와 3년간의 6.25 전쟁, 그 후 가난과 핍박의 세월을 견디시며 살아 오신 93년의 하루하루는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우셨는지 이 어린 후손이 어찌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육체적인 피곤과 상처 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쓰라린 정신적 고뇌와 마음의 상처를 어느 한가지도 빠짐없이 겪으셨던 93년은 얼마나 길고 지루하셨는지요? 아니, 할 일이 너무 많고 하시고 싶었던 일이 얼마나 많으셨기에 90이 넘으시도록 여의도 사무실로 출퇴근을 하셨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故 류 달 영 선생님,
말과 글로 나라가 분열되는 시기는 일찍이 없었던 걸로 추정되는 최근의 세태를 보시면서, 지난 10월 27일 오후 5시 56분에 눈을 감기가 얼마나 어려우셨습니까? 시원한 꼴을 보여 드려도 시원치 않을 후배들이, 선생님 영전을 찾아 뵐 면목조차 있는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선생님 같은 분이 지금, 30~40대의 연령으로 몇 분이라도 존재할 수 있다면 나라의 모습은 이렇지 않을 터인데, 워낙 배움이 짧고 경험이 미천한 무리들의 난잡한 행태에 무너져 가는 국가를 살려 낼 힘 조차 모두 잃는 것 같아 가슴이 쓰리고 마음이 아릴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더욱 아름답고 조용한 곳으로 영면하시어
민족과 국가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은 옳은 쪽으로 결정이 될 것으로 믿으며,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결국에는 그만한 대가를 치루게 되면서 또 다른 고통과 영욕의 세월을 겪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설령, 나라가 뒤집어지고, 당파싸움과 파벌 입김으로 국민이 산산조각이 난다고 해도 이는 말릴 수 없는 민족의 무능력의 탓이려니 하고 순응하면서 망가질 각오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러하오니, 선생님께서는 아무 걱정 하지 마시고, 뒤돌아보시며 너무 아쉬워 하지 마시고, 편안히 잠드시기를 기원합니다.
2004. 10. 30. 아침, 홍 석 기 올림
류 달 영 선생님.
93년을 사시면서 너무 많은 일을 하시어 그 업적을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류 달 영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3년 전, 신문기사를 통해 뵙게 되었으며, 당시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에 감동을 받아, 가는 데마다 선생님의 말씀을 전하며 “이 시대에 다시 뵐 수 없는 어른” 한 분을 지면(紙面)이나마 통해 알고 있다는 것으로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살아 생전에 꼭 한번 뵙고 싶었고, 여의도를 갈 때마다 망설였지만, 제 모습이 너무 초라하여 늘 미루며 살아 왔는데, 지금 얼마나 후회를 하는지 모릅니다.
46년부터 서울대 농대 교수로 재직하시면서, 농민신문을 창간하시고, 한국의 보이스카우트를 창단하시고, 나라 꽃 심기에 앞장서 “한국무궁화연구회”를 창립하시고,
농학교수는 직접 농사를 지어야 한다며 60년대 초부터 수원에 “평화농장”을 만들어 놓으셨다가 고속도로 편입에 따른 토지보상비를 받아서 “성천문화재단”을 만들어 문화활동을 펼치시고, 상록수의 주인공 최 용 신과 농촌계몽운동을 펼치신 선생님의 업적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수필집 “눈 속에 잎피는 나무”, “외롭지 않은 나그네 길”, “자연과 사랑과 인생”, “류 달 영 인생론 7권” 등을 집필하시는 동안 눈이 어두워지고 손목이 아프셨을텐데,
그 “멈추지 않는 열정과 애국심에 대한 갈증”은 아직도 다 풀어 놓지 못하셨으리라 생각하니, 어르신네 같은 분은 100년을 더 사셨어야 하는 게 아닌가 투정이라도 부려 보고 싶을 뿐입니다.
쓰러진 국가를 재건하는데, 그토록 많은 일을 하실 수 있는 인간이 한 국가에 존재할 수 있었다는 건, 그 민족의 행운이요 기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일제시대 이전에 태어 나셔서, 36년간의 일제 통치와 3년간의 6.25 전쟁, 그 후 가난과 핍박의 세월을 견디시며 살아 오신 93년의 하루하루는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우셨는지 이 어린 후손이 어찌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육체적인 피곤과 상처 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쓰라린 정신적 고뇌와 마음의 상처를 어느 한가지도 빠짐없이 겪으셨던 93년은 얼마나 길고 지루하셨는지요? 아니, 할 일이 너무 많고 하시고 싶었던 일이 얼마나 많으셨기에 90이 넘으시도록 여의도 사무실로 출퇴근을 하셨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故 류 달 영 선생님,
말과 글로 나라가 분열되는 시기는 일찍이 없었던 걸로 추정되는 최근의 세태를 보시면서, 지난 10월 27일 오후 5시 56분에 눈을 감기가 얼마나 어려우셨습니까? 시원한 꼴을 보여 드려도 시원치 않을 후배들이, 선생님 영전을 찾아 뵐 면목조차 있는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선생님 같은 분이 지금, 30~40대의 연령으로 몇 분이라도 존재할 수 있다면 나라의 모습은 이렇지 않을 터인데, 워낙 배움이 짧고 경험이 미천한 무리들의 난잡한 행태에 무너져 가는 국가를 살려 낼 힘 조차 모두 잃는 것 같아 가슴이 쓰리고 마음이 아릴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더욱 아름답고 조용한 곳으로 영면하시어
민족과 국가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은 옳은 쪽으로 결정이 될 것으로 믿으며,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결국에는 그만한 대가를 치루게 되면서 또 다른 고통과 영욕의 세월을 겪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설령, 나라가 뒤집어지고, 당파싸움과 파벌 입김으로 국민이 산산조각이 난다고 해도 이는 말릴 수 없는 민족의 무능력의 탓이려니 하고 순응하면서 망가질 각오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러하오니, 선생님께서는 아무 걱정 하지 마시고, 뒤돌아보시며 너무 아쉬워 하지 마시고, 편안히 잠드시기를 기원합니다.
2004. 10. 30. 아침, 홍 석 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