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옳은가?

어떻게 살아가는 게 올바른 것인가?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정의는 개개인이 이성의 올바른 사용에 의하여 지켜야 할 덕목이며 사회질서 전체가 이상적 형태로 지향해 나갈 하나의 보편적 일반적 가치기준이라고 한다.

물론, 정의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



일찍이 2,4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일반적 정의와 특수적 정의로 나누었고, 특수적 정의는 다시 평균적 정의와 분배적 정의로 나누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정의는 평등을 의미하지만, 이는 모든 인간과 사례를 평등하게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취급하는 척도의 평등, 즉 인간과 사례가 상이하다는 척도에 따라 다르게 취급하는 것을 의미하며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라. 즉,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하라는 것이다.(이상 김동훈 外 공저, “신법학입문”中에서)





어렵게 시작한 내용을 기반으로 최근의 실업과 실직, 무직을 생각해 본다.


300만 명이 할 일이 없다고 한다. 청년 백수가 100만 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기업은 사람을 구할 수 없다고 난리법석이다. 농촌에서 밭 갈고 논두렁을 깎으며 씨를 뿌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인네들이다. 중소기업 공장에는 외국인 근로자가 100만 명이란다. 이 어찌된 일인가?

월급 적으면 싫고, 지방근무는 반갑지 않고, 고된 일을 원했던 게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살 작정인가? 그대로 주저 앉아 부모님의 그늘에서 버틸 셈인가?




갑자기 김연아 선수를 떠 올린다. 연간 100억을 버는 어린 소녀가 반가운 친구들을 멀리하고 그 머나먼 곳, 캐나다까지 고된 훈련을 받으러 가고 싶었을까?


욕망의 억제와 가벼운 즐거움을 거부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속박을 견디려는 것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며, 즐겁고 신나는 인생을 살고 싶다고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마음껏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 싶다고 한다. 어떻게? 막연히?

대학을 졸업했다고 하며 모두 대졸 이상의 대우를 받고 싶어한다. 정말 대학을 졸업한 만큼의 실력과 능력을 갖추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한창 좋은 시절의 한복판에서 4~5년간 5천만 원을 들여가며 쓴 시간과 돈이 투자였는지 낭비였는지 묻고 싶다.

무엇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지도 모르면서 선택한 전공과 학교는 미래를 선택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얼마나 노력하고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도 묻지 않는다. 다만, 지금 무엇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는지를 기업은 묻고 있는 것이다.



자격증도 없고, 외국어 실력도 없고, 대인관계도 약하고, 어렵고 지겨운 책은 읽지 않고, 제대로 된 글도 쓸 줄 모르면서 좋은 대기업에 가고 싶다고 목을 매는 젊은이들을 보면 마음이 쓰리고 아프다.

수십 수백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회사에서 지방근무가 싫다며 1년도 못되 사직서를 쓰고, 원했던 일이 아니라고 사표를 던지는 가벼움은 기업의 엄청난 비용으로 되돌아 온다.



노인네들은 늙었다고 불러 주지 않고, 40~50대는 사오정이라고 외면당하고,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다고 한다. 그게 사실일까?



신문에는 90세의 택시운전사에 대한 기사가 실린다. 나는 얼마 전, 95세의 어르신네로부터 새로 출판하셨다는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50대 후반에 5개 국어를 구사하며 사물놀이패를 세계무대에 올리는 단장이 있다. 계약직으로 은행에 입사하여 과장으로 재직 중인 여사원도 있다.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가? 어디까지 정부에서 지원을 해 주어야 하는가? 실업대책을 위해 수 조원의 정부재정과 국민의 혈세를 쏟아 붇는다고 한다. 또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을지 걱정이다.



평등한 대우를 받고 싶은가?
공정한 대가를 바라는가?
공정하고 평등하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엄청난 비난을 감수하며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