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봄이 갔다. 주역의 괘로 말하자면 쾌괘 건괘 구괘의 양기가 음기를 압도하는 여름이 도래했다. 예로부터 선비들은 봄이 끝날 무렵 전춘(餞春)이라고 해서 야외에서 꽃전병을 부쳐먹으며 봄을 보내는 아쉬움을 노래하는 시회(詩會)를 열곤 했다. 봄은 계절의 여왕이며 사랑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강렬한 슬픔을 간직한 이별의 계절이기도 하다. 사랑이 끝나면 이별이 온다. 동물은 봄에 2세를 잉태하면 다시 길을 떠난다. 사랑을 집착하는 것도 욕심이다.

봄을 노래한 시는 사랑의 기쁨보다는 단연코 사랑의 슬픔과 이별의 고통으로 점철되어있다. 김영랑은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찬란한 슬픔의 봄을 노래하기도 했다. 사실 봄은 원래 슬프다. 세상에 등따숩고 배부른 이가 얼마나 되랴? 춘한(春寒)과 춘궁(春窮)에 찬란한 봄날이 더 슬프다. 이룬 일은 없건만 무상한 세월은 야속하기만 하지 않던가? 그래서 배가 고파서 슬프고, 계절이 또 바뀌어서 슬프다.

자유분방한 연애감정을 노래한 것은 현대시 만은 아니다. 전통시대 점잖은 선비들의 시도 현대에 못지 않다. 한국문학이 낳은 명시로 꼽히는 고려 중기의 대시인 鄭知常(?∼1135)의 작품을 보자.




送人 정지상




雨 歇 長 堤 草 色 多

送 君 南 浦 動 悲 歌

大 同 江 水 何 時 盡

別 淚 年 年 添 綠 波.




비개인 긴 둑에 풀빛이 짙은데

님 보내는 남포에는 슬픈 노래 울린다.

대동강 강물은 마를 새가 있을까?

이별의 눈물을 해마다 뿌리나니.




정지상은 易學과 佛典에 精通하고 서화에 능했으며 老莊思想에도 밝았다. 陰陽秘術에도 관심이 많아 당시 妙淸·白壽翰과 함께 三聖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시에 뛰어나 고려 12시인의 하나로 꼽혔다. 그런데 그는 낭만적이면서 혁명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유교적이고 사대적인 성향의 개경세력과 대립하여 西京遷都와 征金論을 주장하였다. 묘청의 혁명정책을 적극 지원했으나, 결국에는 金富軾에게 참살되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아름다운 봄날에 이별을 할까? 서로 만나도 시원찮을 판에 이제 날씨도 풀려서 좀 살만하니 이별이라니! 그것은 농경사회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옛 사람들이 장거리 출타를 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장자에 보면 교외에 놀러가는데 3개월을 곡식을 찧는다고 했으니, 지금처럼 신용카드 한 장 들고 기분내키는 대로 드라이브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아무리 떠나간 친구가 보고싶어도 농번기에는 떠날 수 없다. 결국 추수와 김장이 끝난 초겨울의 농한기나 되어야 가능하다.

가령 충청도 부여땅에 사는 임초시가 평양에서 벼슬을 하는 옛 글방친구를 보고싶어 길을 떠난다고 치자. 얼마나 걸릴까? 노자돈은 얼마를 준비해야 할 까? 아마 적어도 달포는 밖에서 먹고잘 채비와 노자를 준비해야만 했을 것이고, 왕복하는 비용을 계산해본다면, 그렇게 만만한 비용이 아니다. 또 그렇게 오래 걸렸으니, 한번 만났다고 점심먹고 헤어질 수 있겠는가? 그렇게 차일피일을 서로 붙잡고 정담을 나누다 보면 어느덧 대동강물이 풀린다는 우수가 되고 경칩이 될 것이다. 그제서야 친구는 더 이상 만류할 수가 없어서, 어느 봄날 대동강 강가에까지 옛친구의 손을 부여잡고 전송을 나왔으리라. 그래서 다시 먼길을 떠나가는 친구에게 이 시를 눈물로 지어주었으리라. 잘가게 보고싶은 친구여! 나의 젊은 봄날이여! 나의 순수한 童心이여! 그렇게 봄날은 가고 애닯은 이별의 추억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