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연

인생은 우연에 의해서 크게 좌우됨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떤 우연은 일상속에 매몰되어 금방 잊혀져버리고 말지만, 어떤 우연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가령 몇십년전의 국민학교 동창생을 길거리에 마주친 것도 쉽게 만나기 어려운 우연이지만 금방 잊혀져버리고 만다. 그야말로 우연이요 의미없는 우연이다.

그런데 로또복권의 당첨은 우연의 결과이지만, 복권을 살 때나 추첨할 때의 전날 저녁에 길몽을 꾼 경우는 순수한 우연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온통 산삼생각으로 온 산을 헤매던 심마니가 산삼을 발견하는 것은 우연일까?

물론 건강한 우연도 있고 병적인 우연도 있다. 점심내기 사다리타기는 건강하다면 도박중독자의 광땡의 꿈은 정신 깊숙이 든 병이다.

또 우연한 일이 불운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우연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대부분 어떤 인과관계의 형태로 파악한다. 이전의 어떤 잘못된 행위가 그런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경향은 자신을 반성하고 노력하게 하므로, 자신의 발전을 위해 좋다. 그러나 우리의 주변에서 보면 이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낙담하고 좌절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이런 경우에 왜 우리는 우연을 우연으로 보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만 뜻밖에 마주친 우연은 인생의 활력소이자 행운의 여신이 가져다준 선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특별히 우연의 경험을 재미있게 받아들인다.

다시 말을 바꿔보자. 두꺼운 사전에서 자신이 모르는 단어 하나를 찾으려면 한참을 뒤적거려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사전을 척 펼쳤더니 그 단어가 한번에 눈에 들어오던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무심코 펼칠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펼칠 수도 있겠지만, 그 수십만 단어가 실려있는 두꺼운 사전속에서 한번에 단어를 찾게 되었다면 이것도 우연일까?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던 학생시절 2천페이지 가까운 영어사전을 한번에 찾았던 일들이 자주 일어나곤 했다. 필자도 그랬지만 독자 여러분들도 이런 재미난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칼 융은 한번에 펼친 사전에 자기가 찾던 단어가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의도된 우연과 자연히 발생된 우연은 구별해야될 것 같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우연은 당사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자연히 일어난 우연이지만 산중에서 심을 본 것은 의도된 우연이라고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앞 글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필자가 로또에 당첨되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왜냐면 필자는 로또에 당첨하려는 의도가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아예 매입해둔 로또복권이 없었으므로 당첨의 가능성도 원천적으로 0일뿐이다. 그러나 본인이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찾아헤메는 – 산삼을 캐거나 사전을 찾는- 경우는 이와는 다르다. 관점을 달리해서 말해본다면 이는 우연이 아니라(非偶然) 정성의 소치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해서 공을 들이고 정성만 들이면 그런 대박이 터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또한 우연의 힘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연은 신나는 경험도 된다.




나는 점을 믿으라고는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점을 이용할 줄은 알아야 한다. 점을 믿는다는 것은 우연을 절대화하고 신비화하는 행위이며, 우연을 우연으로 보지 않고 필연으로 만든 것이다. 실제로 점을 잘못 믿어서 잘못되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목도한다. 그러나 점을 잘 이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연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며, 재미있고 신나며 지혜로운 행위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연한 점(占)은 우리의 문제에 어떤 힘을 발휘하게 된다.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무엇보다도 본인이 간절하게 찾아헤매는 어떤 문제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아무 생각없이 마주친 길거리의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는다. ‘용이 밭에 나타났으니 대인을 만나는 것이 이롭다’(주역 乾卦 九二 爻辭)는 占辭는 풍전등화의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혁명을 꿈꾸는 이에게는 구원의 메시지가 될 수도 있지만,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馬耳東風이란 이런 경우를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깨어있는 이에게는 삼척동자의 말에서도 金科玉條를 얻는다. 더구나 점은 재미있고 신나는 우연이란 방법을 사용한다. 우연의 방법으로 점을 얻는 것을 무작위이며 무심이라고 하며 천명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우연이란 내가 아닌 전혀 다른 시각에서 나를 바라보는 방법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점(占)이란 프로그램된 미래의 운명을 계산해내거나 계시받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얻은 촉매로 인해- 간절한 정성으로 가득 충전된 자신의 내부에서 靈感의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이다.


우연히 친 점의 결과를 길거리의 우연으로만 돌려버리는 것과, 길하든 흉하든 자신의 문제에 꼼꼼히 비춰보고 자신을 반성하고 더 노력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우연을 이용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칼 융이 말한 synchronicity(同時性 :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는 정성이란 순수한 의도를 지닌 이에게 일어날 확률이 높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우연은 비우연이 된다. 결국 우연이든 비우연이든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을 진다는 점을 말해준다. <<월빙라이프>> 2006년 7월호 게재분 수정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