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유감 -어륀지, 비즈니스프렌들리, 그랜드바겐



다 아는 이야기지만 세계에는 6912개의 언어가 있는데, 현재 한글의 사용인구는 7739만명으로 세계 언어 중 13위에 이르는 메이저 언어라고 한다. 세계지식재산권기구는 한국어를 9번째 국제 공개어로 채택했다. 2007년 유엔 산하 세계지식재산권기구는 한국어를 국제특허 협력조약의 국제공개어로 채택했다. 1997년 첫 회 때 2600명이었던 한국어능력시험 응시자가 올해 27만명에 달하고 누적 응시자도 100만명을 넘어섰다. 한국어학과와 강좌를 개설한 외국 대학이 54개국 642곳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기쁜 소식은 올해 인도네시아 부톤섬 찌아찌아족이 한국어를 사용해서 그들의 언어를 기록하고 읽기로 했다는 뉴스였다. 나는 어렸을 적 가난한 약소국 한국에서 태어난 것이 슬프고 싫었다. ‘약소국의 설움’이란 말은 당시의 유행어였다. 어느 사이엔가는 ‘개발도상국’이란 말이 퍼지기 시작하다가 어느덧 OECD가입이니 ‘선진국의 문턱’이란 말이 들렸고, 며칠전에는 G20에 든 선진국이란 말까지 들린다. 이젠 우리의 언어가 몇몇 전문학자를 위시한 민간인들의 노력으로 수출까지 하게 되었다니. 정말 꿈같은 소식이었다. 내 아이들에게도 이젠 정말 떳떳하게 우리나라는 선진국이란 말을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현 정부는 별로 한글을 사랑하는 것 같지가 않다. 정권이 들어서기도 전에 ‘어륀지’라는 괴상한 신조어를 만들어내더니, ‘비즈니스 프렌들리’라는 난생 처음들어보는 정책명을 들고 나오다가, 어저께는 ‘그랜드바겐’이란 대북정책을 쓴다고 한단다. 창피하지만, 난 북한에 대해 바겐세일을 한다는 말인 줄 알았다. 쌀과 시멘트를 북한에 대염가판매를 한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신문을 보니 그게 ‘일괄타결’이란 뜻이란단다. 참 공교롭게도 그 신문의 바로 옆 광고란에도 모 백화점에서 ‘그랜드바겐’을 한다고 쓰여있었다.

나는 영어는 잘 못하지만, 그래도 정상적인 교육을 받았고, 나름대로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나는 모른다. 그랜드바겐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비즈니스프렌들리건 그랜드바겐이건 그 뜻을 아는 사람들이 우리 국민의 몇%나 될까를 생각해보았다. 1%나 될까? 그래 후하게 10%라고 해보자. 국민은 국가의 정책에 대해 알권리가 있지 않은가? ‘친기업정책’이든 ‘일괄타결’이든 아니면 ‘대할인판매행사’든 대다수의 국민이 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이름을 불러줄 수는 없단 말인가? 이 정부는 사천만 중 사십만 혹은 사백만을 위한 정부란 말인가? 나머지 삼천구백육십만명 혹은 삼천육백만명은 안중에 없단 말인가? 삼천육백만명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속이 후련하단 말인가?




한글은 독창성과 과학성으로 인해 국제적인 평가를 받았다. 독일 최초의 한국학박사인 함부르크대 사세 교수는 한글은 전통철학과 과학이론이 결합된 세계 최고의 문자라고 평가했다. 이런 이유로 유네스코는 1989년에 세종대왕탄신일인 5월 15일 세계문맹퇴치일로 정하고 문맹을 없애는데 힘쓴 인물과 단체에 주는 상의 이름을 세종대왕 文解賞이라고 붙였으며, 1997년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나는 ‘세계사적 보물’로 일컬어지는 한글의 우수성은 이런 철학성과 과학성 뿐 아니라, 아니 그보다도, 한글의 표현력에 있다고 생각한다. 노랑색을 영어로는 YELLOW라고 하고 중국어로는 黃色이라고 한다. 그 뿐이다. 그러나 한글로는 노랑색의 종류를 표현하자면 한이 없을 지경이다. 굳이 여기에서 소개하지 않아도 우리의 언어생활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우리의 감정과 의사를 한글을 써서 아름답고도 곡진하게 표현하고 있다. 외국인들은 이런 한국의 우수성을 모른다. 왜냐면 언어는 사유의 형식이기 때문에, 미국에는 그렇게 다양하게 표현되는 언어가 없으므로, 미국인으로서는 그런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아예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이렇게 과학적이면서도 아름답고 뛰어난 표현력을 가진 한글을 두고, 이 정부는 어륀지로부터 시작해서 어쩌면 수백년의 국가의 명운을 좌우할 국가정책을 비즈니스프렌들리니 그랜드바겐같은 말로 굳이 표현해야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그래도 이전에는 햇볕정책이라고 했지, 국내에서는 선샤인폴리시라고 부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영어사대주의에 젖은 위정자들에게 한글이란 대체 무슨 의미일까? ‘어륀지’를 오렌지라고 발음하는 이 낙후되고 불편한 한글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한글날 최만리의 상소문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았다.

“우리 정권은(나라는) 조정 이래로 지성껏 미국(중국)문화를 섬기어, 오로지 미국(중국) 제도를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야흐로 미국(중국)과 문물제도가 같아지려고 하는 때를 맞이하여, 언문을 사용(창제)하시면 이를 보고 듣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상하다고 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혹시 언문이 미국(중국)으로 흘러 들어가서 이를 그르다고 말하는 이가 있으면, 미국(중국)문화를 섬김에 있어 어찌 부끄럽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이렇게 언문을 사용하게 한다면 미국의 선진문물(성리학)은 누가 공부하려하겠습니까?” (괄호안은 최만리 상소문의 원문내용)

도대체 이 정권에는 몇명의 최만리가 도사리고 있는지…

그러나 오히려 유명한 미국의 과학전문지 〈디스커버리〉가 94년 6월호에서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라고 극찬했고, 언어학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 세계 모든 언어의 순위를 매겼는데 그 1위가 바로 한글이라고 한다. 그래서 영국의 존 맨이라는 역사 다큐멘터리 작가는 『알파 베타(ALPHA BETA)』란 책에서 ‘한글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라고 했다고 한다.

우리는 한글을 불편하게 여기고 선진화의 걸림돌로 여기는데 오히려 미국 영국에서는 우리 한글을 이렇게 평가하니, 이만한 아이러니도 없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아마 영.미에서 한글을 알아주고 연구해준다면, 그제서야 마치 김치가 기무치로 막걸리 마고리로 되어 역수입되듯이 미국식 한글을 수입해올 것 같다. 그러나 그 때는 엄청난 댓가를 치러야할지 모른다. 헐값에 팔아버렸던 몽유도원도를 다시 사들여야 할 때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인간의 사유는 언어의 형태를 떠나지 못한다. 우리가 무엇을 사유한다고 할 때, 그 형식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형식을 따른다. 그래서 한 민족의 글과 언어는 그 민족의 사유를 지배한다. 조선시대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斯文亂賊이란 성어의 뜻도 글을 어지럽히는 도적이란 말이 아니던가?



필자는 한글전용론자도 아니고, 남보다 한글을 더 사랑한다고 자신할 수도 없는 사람이다. 외국어는 될 수 있는대로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필요하다면 영어건 중국어건 외국어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요를 훨씬 넘어선 이 정권의 한글관은 좀 너무 하지 않은가?
얼마전 한글운동을 하는 분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한글수출문제를 상의하러 정부 담당부서를 찾아갔더니, 귀찮다는 듯이 무엇하러 한글을 수출할려고 하느냐고 하더란다. 이런 정권하에서 한글의 발전을 기대한다는 것은 연목구어일 뿐이다. 그저 한글을 조금만 손상시켜달라고 빌어야할 판이다.

한글날 아침 신문에 백화점의 그랜드바겐 광고와 함께 나란히 실린 정부의 그랜드바겐정책을 보면서 부끄런 마음과 더불어 참으로 한심하단 생각이 들었다. 누가 이렇게 한글 허무주의로 몰아가는지를!대체 이정권은 왜 하필 최만리같은 자들로만 코드를 맞추고 있는 것인지를!
예나 지금이나 지배층들은 사대주의에 빠져 大國의 글에 도취되어 있었을 뿐, 한글에 의지해서 생각을 담아내고 곰살맞은 다양한 표현들을 가꾸어온 계층은 정작 힘없는 서민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서민을 위한 정책을 편다고 노래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