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와 해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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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와 해운대
TV에서는 여러 차례 <2012>의 개봉소식을 전하고 있었지만, 신문에는 헐리웃의 재난영화가 감동이 없고 설득력있는 스토리가 없다면서 우리의 해운대만 못하다고 평하고 있었다. 이미 구세대의 반열에 든 나는 어릴 적 보았던 <포세이돈어드벤쳐>나 <타워링>이 떠올랐다. 얼마전 DVD로 <해운대>를 보고서는 찡한 감동과 함께 영화관에서 보았더라면 하고 아쉽기도 했던 터라, 이번에는 영화관에서 보고 싶었다. 대재앙의 틈바구니속에서 빛나는 휴머니즘 그리고 극한상황속에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서 재난을 이겨내는 영웅의 등장 등 재난영화는 뻔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대장관을 펼쳐놓고 충분한 볼거리와 강렬한 감동을 주는 흥미로운 장르였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기껏해야 미니어처를 이용한 촬영이라서 量感에서 좀 문제가 있었지만, 지금은 컴퓨터그래픽으로 처리를 한다니 아마 전화면을 압도하는 웅장한 장관이 펼쳐질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오래간만에 영화관을 찾았다. 본영화가 시작되고 콜롬비아사의 횃불을 든 여신이 등장하는 바로 밑에 Sony란 이름이 보였다. 얼마 전부터 영화산업에 대기업들이 투자해서 규모를 키운다는 사실은 익히듣고 있었지만, 헐리웃 영화사 지분의 70%를 이미 일본 기업이 갖고 있다는 소문이 실감났다. 역시 곳곳의 중요한 고비마다 슬쩍슬쩍 등장하는 일본의 이미지들이 보였다. 그것은 마치 TV드라마를 보려면 또한 광고를 봐야한다는 논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속성인 것을! 또 티벳을 배경으로 하긴 하지만, 지구종말을 대비하는 거대프로젝트를 책임지고 신속하게 수행하는 중국이란 오래된 거대 왕국의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들 일본이나 중국에 대해 한국은 아예 존재 자체가 없었다. 일부에선 우리가 이미 선진국의 반열에 들었다고도 하지만, 우린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세계인들에 어필할 수 있을까?
신문에서 비평하던 대로 좀 설득력이 떨어지는 부분도 있었다. 가령 마야의 예언같은 것이 그러했다. 마야문명은 고대시기에 갑자기 사라졌고 근세 제국의 파시스트들이 철저히 파괴해버렸기 때문에 우린 마야문명에 대해 현재 아무 것도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밑도 끝도 없이 마야의 예언을 들고 나오는 부분이나, 지구종말을 예언하면서 G8의 정상들만 안다고 하는 비밀계획을 손바닥보듯이 알고 있는 미치광이종말론자 찰리의 존재등은 굳이 이 영화에 필요한 요소들이었는지는 문외한인 나로서도 좀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렇게 이 영화가 감동이 없고 황당하다는 평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재난영화에 공식처럼 등장하는 영웅이긴 하지만 이혼한 뒤에 홀로 운전수로 살아가는 주인공 잭슨 커티스 및 그의 상처받은 가족들과 함께, 흑인과학자 에이드리안 햄프리 박사와 그의 친구인 인도과학자, 우리 모두는 대지의 형제라는 티벳의 젊은 승려와 그의 어머니는 이른바 마이너리티나 소수민족들이 전면에 나서고 있다는 점에서 신선했다. 또 미국대통령으로서 세계인들에게 진실을 알려주어 가족들간에라도 마지막 작별인사를 할 시간을 마련해주는 것이 도의라면서 피신을 거부하는 흑인대통령이나 역시 바티칸의 마지막 미사에 참여하는 이탈리아 수상의 모습 역시 뛰어난 리더십으로서가 아니라 휴머니즘적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 재난영화는 종말론을 배경으로해서 태양의 작은 변화가 지구상에 대재앙을 야기할 수 있다는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지만, 최근 빙하가 녹아내리고 바닷물이 뜨거워지는 엘리뇨라는 기상재변등 심각한 지구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최근의 환경문제에 대한 경고의 의미도 지닌다는 점에서 시의적절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또한 우리 영화 해운대에서도 이혼등으로 파괴된 가정을 가진 과학자와 지각변동 및 해수의 내침이라는 사회학적,과학적인 문제의식은 우연의 일치인지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었다. 다만 비록 60만년에 한번 일어난다고는 하지만 행성의 직렬배열이 태양에 영향을 끼치고 태양의 작은 변화는 전지구적 재앙을 불러일으킨다는 설정은 그것이 주기적으로 예정되어있고 예측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쓰나미라는 우발적 재난보다는 더 과학적 근거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사실 五星聚合은 우리의 환단고기와 송하비결에도 등장한다.)
대해일과 Big Ship이 바이블에 등장하는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를 패러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순도에 의해 휴거가 일어나지 않고 권력이나 자본의 힘에 의해 구원의 승선권을 구입하는 장면은 자본주의의 아이러니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또 다빈치의 모나리자등 인류의 예술품을 비밀리에 Big Ship에 보존한다는 설정은 노아의 방주에는 등장하지 않는 흥미로운 스토리였다. 종교는 이 대재앙 앞에서 종말이 가까웠음을 암시하는 복선일 뿐 더 이상 인간구원의 힘을 발휘하진 못한다. 더 이상 신의 의지에 수동적으로 맡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스스로 만든 문명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한다.
그 문명의 본질은 과학이었다. 아직 과학의 힘으로 대재앙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지만, 대재앙을 예측하고 인공위성을 통해서 파멸의 순간을 손바닥보듯이 지켜보면서 최선의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조적으로, 대재앙의 징조인 대지진을 겪으면서도 진실을 숨기는 국가권력이나 그에 추종하는 언론매체들, 그리고 -다소 설득력은 떨어지지만- 대재앙의 비밀이 새어나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루브르박물관장을 암살한다거나, 극비리에 승선권을 자본가들에게 10억유로에 판매하고 자신들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정크선의 문을 닫아버리려는 정치가등은 자본주의 제도하에서의 권력집단의 냉혹한 본성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최종적인 결단의 순간에는 과학적 예측이나 현실적인 계산보다도 우리 모두는 대지의 형제이며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휴머니즘의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 세상의 종말에서도 끝까지 믿음의 끈을 놓지않는 인류애와 휴머니즘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를 우리에게 확인시켜주었고, 작게는 가족간의 믿음과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휴머니즘의 힘이 -냉철한 과학과 조화를 이룰 때- 결국은 인류를 구해내는 궁극적 원동력임을 이 영화는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대재앙을 간접경험함으로써,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지구적 환경문제에 대해서, 인류는 현재 국가나 민족이나 자본 사이에 복잡한 갈등을 겪고 있지만, 결국에는 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란 암시를 주고 있다. 그것이 새로 대두되고 있는 산업이자 영화라는 장르가 보여준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