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의 정오뉴스를 켜니, 구자철이 연속으로 승점을 올리는데 실패했다는 뉴스와 함께 박지성이 프리미어리그전 엔트리 명단에서 빠졌다는 뉴스가 나온다. 온 국민이 귀기울여 듣는 뉴스시간에 이런 ‘별볼일 없는’ 소식을 온국민이 알아야할 새소식이라고 전해야 할 까? 박지성이 출장했다는 것은 그나마 새소식일수도 있다. 구자철이 연속으로 득점을 했다는 것은 그나마 새소식일 수도 있다. 하지만 득점한 것도 아닌 승점을 올리지 못했단 것이 뉴스이며, 경기에 출전한 것도 아닌 엔트리 명단에 빠진 것도 뉴스거리가 되는 것일까?

물론 일부 열혈 팬들에게는 중요한 뉴스일 것이다. 하지만 아마 전국민의 1%도 안될 극소수만을 위해 ‘별볼일 없는’ 사실도 뉴스로 들춰내야 하는가? 도대체 뉴스거리가 그렇게 없어서일까? 해외에 나가 뛰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기특하고 관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스포츠전문 방송도 아니고, 정규 뉴스시간에 전국민을 대상으로 이런 내용을 전하는 것은 좀 심하단 생각이 든다. 우리가 인정이 많아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방송계 인사들이 아직도 백년전 서구의 선진문명이라면 무조건 추종하던 식민지적 수준이어서인가? 아니면 못살던 시절 일본 미국의 덩치큰 레슬러들에게 박치기 한방을 먹이던 김일에 열광하던 그 수준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5공화국의 스포츠정치에 길들어져있기 때문인가?

박지성선수는 나도 좋아한다. 한일월드컵에서의 그의 통쾌한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고, 세계적 스타가 되었으면서도 성실하면서 소박하고 겸손한 박선수를 싫어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우리 언론의 태도는 너무 친절하다 싶다가도 좀 너무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필자는 복잡한 현대사회의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려주는 스포츠에 대한 관심도 좋지만, 좀 여러 방면에 골고루 조명을 비춰주고, 정말로 필요하고 알아야할 거리들을 전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 사회에는 언론에서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여서 사회적 관심을 촉진해줄 필요가 있는 그늘진 곳이 좀 많지 않은가? 그것이 언론이라는 당대의 史官이 가져야할 중요한 덕목이 아닌가?

지금 인문학은 위기라고 말한다. 필자도 인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 배고픔과 외로움을 처절하게 맛본 사람중의 하나일 것이다. 청춘과 재능을 학문과 문학에 바쳤건만 누구 하나 관심가져주지 않는 현실에 절망하는 학자와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아마 그 비참함은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천배 만배 더할 것이다.

인문학 저서 1권을 쓰려면 최소한 1년은 투자해야 한다. 그런데 출판사는 좀 까다로운가? 어지간한 내용으로는 출판사에서 출판하지 않는다. 자칫하면 1년간 기울인 온 정성이 공으로 돌아가버리기 십상이다. 아무튼 유수의 출판사에서 내 원고를 받아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영광이다. 그리고는 다시 6개월에서 1년에 걸친 편집 교정을 거쳐서 출간이 된다.

그렇게 5백권을 팔면 인문학계로서는 베스트셀러(?)가 된다. 하지만 그 인세 수입은 백만원이다.(정가를 2만원으로 높여서 계산해본 것인데, 박지성 연봉 60억원으로 나눠보니, 1시간20분 어치이다) 그런데 새 책을 출판했다고 주위의 친지들에게 50권을 돌리고 나면 수입은 0가 된다.

그러나 사실은 0가 아니다. 자료수집을 위해 책을 산 비용, 책을 빌리기 위해 돌아다니며 밥사고 술을 산 비용과, 이후에도 계속 저자에게 요구받는 친필 증정의 수요에 충당해야하는 자기 책값까지 계산한다면 2년을 투자한 결과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5백만원은 될 것이다. 최고의 선수 박지성은 2년이면 백여억원을 벌지만, 최고의 지성인이 총2년을 투자한 결과는 -5백만원이다. 너무 차이가 나서 대비를 할 수가 없다.

세상에 이런 계산법이 있다니, 이러고도 살수 있다는 것이 정말 신기하지 않은가? 이것이 인문학의 대차대조표이다.

날이 갈수록 더나빠진다.
그래서 인문학자는 글을 쓰면 쓸수록 책을 내면 낼 수록 빚더미에 나앉게 된다는 결론이다.

반면 정치가나 유력인사는 신변잡기를 나열한 그것도 대부분 대필한 책을 내면서 호텔에서 화려한 출판기념회를 연다. 그리고 적게 잡아도 수억원에서 십수억원을 챙긴다. 박지성이나 권력가들을 반례로 들은 것이 좀 현실감이 떨어지니, 이들을 더이상은 거론하지 말자.

사람들은 말한다. 원래 학자는 배고픈 것이라고, 그리고 학자는 명예로 살지 않느냐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래 학자는 먹지 않고도 살수있다(?)는 결론을 내려보자.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는 차치하고라도, 내가 경험한 작은 실례만을 하나 들어보자.

내가 아는 정말 재능있는 젊은 인문학자가 한 명 있다. 그는 인문학에 관한 패기있는 저서를 몇 권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최근 학문을 접었다. 대신에 며칠간 용접을 배워 용접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인문학자의 1년이 박지성의 1시간도 못될 뿐 아니라, 40년을 배운 인문학이 4일을 배운 풋내기 용접일보다 수입이 적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하면 목구멍에 풀칠은 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목도 뜨끔거렸다.

누군가는 힐난할 것이다.
“그래 누가 인문학을 하랬어? 제가 좋아해서 해놓고 왠 볼멘소리야?”

그래 맞다 그래서 인문학을 접은 그는 현명하다.

어느 시인이 간신히 자신의 시집을 한 권 출간했다.
시인은 허기진 배를 달래려 국밥집에 가서 보니, 자기 시집의 책 값보다 국밥 한그릇값이 더 비쌌다.
그는 시집이 국밥의 값보다 헐하다고 불평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그를 나무랐다.
“당신의 시가 언제 한번이라도 이 국밥처럼 사람들의 허기진 속을 따뜻하게 달래준 적 있소?”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그래 맞다.
굶어가면서도 시를 쓰고 시흥에 취하던 과거의 문인 학자들의 시대는 끝난지 오래다.
이제 우리에게는 따뜻한 국밥이 한편의 너줄한 시보다는 훨씬 더 좋다.

그러니 시인이건 인문학자이건 글을 쓰지 않는 것이 빚을 덜지는 길이다.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그래서 우리 사회를 그리고 인류의 정신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일구게 될거라는, 그런 나이브한 생각은 아예 싹조차 나지 않도록 미리 억눌러 버리는 것이 좋겠다.

결국 우리 사회에는 문화란 없고, 욕망과 본능으로 무장한 정글이 되어간다…
이것이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최근의 한류수출에 이르기 까지 정신없이 추구해온 근대화의 이면이 아닐까?


–이제라도 저 ‘친절한’ 스포츠뉴스처럼, 인문학 소식도 뉴스거리로 다뤄준다면 우리에게 인문학의 위기란 말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에게 구자철이 승점 올리는데 실패했다는 실망스런 소식을 전하기보다는, 오늘 발표된 어느 무명시인의 시를 한편 듣는다거나, 어느 무명의 인문학자가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글을 써서 주목을 받고 있다거나, 잊혀졌던 우리의 고유 사상을 밝힐 수 있는 자료를 발굴했다는 뉴스를 당당하게 듣게 되고, 그래서 사람들이 화제거리로 삼고 관심을 기울이는 그 날을꿈꿔본다. 인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