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3수

인간은 일반적으로 이분법으로 나누기를 좋아한다. 낮과 밤, 남과 여, 추위와 더위, 길고 짧음의 자연의 물리적 이분법도 그렇거니와, 우리 인간이 마주치는 여러 사태들을 선과 악, 미(美)와 추(醜), 동지와 적 인간의 가치론적 이분법으로 딱 나누어야 우리는 비로소 정리 정돈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도토리키재기란 말이 있듯이 교복을 입혀놓고 보면 모두가 다 똑같이 보이는 어린 중고등학생들, 심지어 말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들까지도 일단 우등생과 열등생으로 나누어야 그 아이의 실체를 파악했다는 듯이, 속이 후련한 것이 인간의 못된(?) 성정이다. 가령 어떤 아이가 우등생고 아니고 열등생도 아니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 아이의 정체를 뭐라고 판단할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3이란 숫자는 음양적 이분법으로 분할되지 않는 또 하나의 영역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독특하면서 불편하기도 한 숫자인 동시에, 인간의 이성적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 신의 숫자이기도 하다.

아베총리가 참배를 하느니 마느니를 두고 첨예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일본의 신궁에는 3종 신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칼과 동경과 곡옥이라는데, 도대체 이것들의 용도가 무엇인지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이외에도 바닷속에 존재한다는 삼신산(三神山)의 전설이나, 인간 생명의 탄생을 관장한다는 삼신(三神)할매도 그 정체가 제대로 밝혀져있지 않다. 도대체가 그 존재가 셋인 것인지 하나인 것인지도 불확실하다. 중국인들은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의 3도(島)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호사가(好事家)들의 스토리텔링이지, 나의 생각으로는 반드시 셋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마치 미국진영과 소련진영의 2대 강대국 진영에 속하지 않은 ‘제3세계’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은 이 정치적 개념이 거의 쓰이지 않는 사어가 다 되었지만-, 3은 중국적 지성(知性)의 사유구조를 이루는 음양론적 이분법으로 파악할 수 없는 제3의 영역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우리에게는 천부(天符)삼인(三印)이 있다고 하는데, 어떤 이는 천부경(天符經)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원방각(圓方角)의 이치라는 등 여러 추측만 있을 뿐 그 실체는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의 고대 경전 삼일신고(三一神誥)도 그러하지만 천부경에서도 하나가 셋으로 분화되는 동시에 셋이 하나로 수렴되는 1과 3의 상즉(相卽)관계로 인간과 세계를 파악하고, 다시 이 원리를 통해서 신의 세계에 접근하고 구현한다는 논리이다.
다소 어렵게 말을 했지만, 이 3을 기반으로 한 문화가 우리의 문화이다. 음양론으로 대표되는 중국적 사유와 가장 다른 점이 바로 이에 있다. 이를 토대로 많은 우리 고유문화의 사유체계를 설명해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 이 3의 영역속에 있다. 실존적 인간은 복합적 존재이다. 음으로도 양으로도 어느 일방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때로 논리적으로 모호하거나 애매해보일지라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제3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린 한발더 삶의 실체에 다가설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수수께기 같은 제3의 영역이 삶의 실체적 진실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