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혈구산과 퇴모산 그리고 바다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독하게 덥던 지난 8월 초.
선풍기도 에어컨도 도무지 마땅찮았다.
오로지 자연 바람 솔솔 부는 숲길이 그리웠다.
걸음하지 않은 산으로, 더울때 홀로 산행하기 딱 좋은 산, 어디 없을까?
염천(炎天)이니만큼 사람 들끓는 산은 싫다. 한적해야 한다.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은, 걷기 편한 육산이어야 한다.
울울창창 숲이 우거진 그늘길이어야 한다.
간간이 골바람도 일어 등줄기 땀을 훔쳐 주어야 한다.
이처럼 행복한 고민을 할때, 심장은 그야말로 ‘바운스~ 바운스~’다.
그나저나 바라는 것이 너무 과했나?
이를 충족시켜줄 교집합의 산은 과연?
퍼뜩 강화도 ‘혈구산’이 떠올랐다.
가보진 않았다. 다녀 온 山友 K로부터 들어 느낌은 알고 있다.
‘인적 없어 으스스했다’하니 한적한 산임에 틀림없고,
지도 펼쳐 등고선 살펴보니 완만한 산인 거 확실하고,
민둥산 아닌 다음에야 숲속 그늘은 당연할 터이고,
섬산이라 海風 또한 간간이 기어오르겠지…오케이, ‘혈구산’이다.
서울의 서쪽 끝, 내 사는 강서구에서 3000번 광역버스 타니
1시간만에 강화 시외버스터미널이다.
주말 이른 아침 시간대라 막힘없이 제시간에 도착했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36번 군내버스로 갈아 탔다.
20여분만에 고비고개에 닿았다.
혈구산과 고려산을 가로지르는 고갯길이며
강화도를 동서로 잇는 길목이기도 하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들머리가 보이질 않는다.
물어 볼 사람도, 산 이정표도 없다.
바짝 달궈진 아스팔트 열기만이 후끈하게 다가섰다.
지도를 폈다. 고갯길을 중심으로 북쪽이 고려산, 남쪽이 혈구산이다.
고갯마루에서 잠시 서성이다 50여미터쯤 벗어난 곳에서
혈구산 들머리를 알리는 등산안내판을 발견했다.
고비고개에서 혈구산과 퇴모산을 거쳐 외포리로 내려서는
1코스(8km)를 택했다.
불볕을 피해 허겁지겁 산 속으로 기어들었다.
울창하여 어두컴컴한 숲길, 한적함을 넘어 산우 K의 말대로
으스스했지만 숲속 그늘만큼은 천국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복병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속수무책의 ‘거미줄’과 줄곧 신경전을 벌여야 했으니…
거미줄이 온전한 걸로 보아 적어도 오늘 나보다 앞서 이 코스를
오고 간 사람은 단언컨대 없다.
걷는 내내 눅진한 거미줄이 얼굴에 칭칭 휘감겼다.
잎 무성한 잔가지를 꺾어 더듬이 마냥 휘저으며 걸어야 했다.
한편 거미들로서는 숲속 도발자의 난데없는 싹쓸이에 얼마나 황망했을까?
온 힘을 다해 지극정성으로 줄을 뽑아 먹잇감이 걸려 들기를
고대하고 있었을 터인데, 이토록 무참히 휘저어 버렸으니…
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상쾌하다. 갯내음도 그윽했다.
드디어 시야가 탁 트이면서 숨통도 뻥 뚫리는 느낌이다.
혈구산 정상이 저만치 모습을 드러냈다.
드넓은 바다, 섬산, 초록들판 모습이 수채화처럼 맑다.
정상 주변엔 자주색 무릇꽃이 군락을 이뤄 객을 반긴다.
고딕체로 ‘穴口山’이라 음각된 까만 옥석의 정상표시석과 삼각점이
박혀 있는 봉우리에 섰다.
고비고개서부터 여기까지 3개 봉우리를 지나왔다.
여기 네번째 봉우리가 바로 혈구산 정상이다.
穴口란 상고시대 강화를 부르던 옛지명이라고 한다.
혈구산은 강화도의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또한 한반도의 중심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백두산 정상까지 499km, 한라산 정상까지 486km라 한다.
정상석 뒷면에 그렇게 쓰여져 있다.(국토지리정보원)
강화도 중앙에 위치한 산이라 사위 조망이 굿이다.
남쪽으로 마니산 주능선이, 동쪽으로 강화대교와 문수산성이,
서쪽으로 내가저수지와 외포리, 석모도 등 주변 섬들이,
북쪽으로는 저멀리 헐벗은? 산군까지 시야에 잡힌다.
다 좋은데 땡볕을 가려줄 나무그늘이 없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닷바람은 미지근했다.
그림같은 풍광을 카메라에 담고선 걸음을 서둘렀다.
조금전 지나쳐 왔던 삼거리 갈림길(고비고개, 찬우물고개, 퇴모산)로
되돌아 내려와 퇴모산 방면, 그늘진 숲길로 걸음을 옮겼다.
혈구산에서 퇴모산 지나 외포리까지는 6.9km로 만만찮은 거리다.
혈구산에서 퇴모산까지는 조망없는 숲길이다.
거미줄과의 신경전, 다시 시작이다.
퇴모산 가는 길목에서 만난 첫 삼거리 이정표는
안양대학 1.2km, 퇴모산 2.9km를 가리킨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정표에 표시된 거리를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이후 등장하는 여러 이정표를 눈여겨 보면 기가 찰 노릇이다.
거리 표시는 완전 엉터리다. 아예 무시하는게 좋다.
퇴모산 봉우리(338m)는 산길에서 약간 비껴 있다.
무심히 걷다보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섬산 조망이 대개 그러하듯 퇴모산 역시 막힘없는 조망이 일품이다.
외포리 너머 석모도가 손에 잡힐듯 가까워진 느낌이다.
퇴모산을 내려서면서부터 줄곧 울창한 숲길이 이어진다.
숲향이 그윽하다. 흙내음도 구수하다.
그런데 거미줄에 이어 또다른 복병이 나타났다.
산두더지 흔적이다.
땅밑을 들쑤셔 놓아 길바닥이 자라 등짝처럼 갈라져 올랐다.
무심코 발을 내딛다 길바닥이 푹 꺼져 헛발을 짚기도 여러번.
자칫 발목을 삘 수도 있겠다.
거미줄 걷으랴, 길바닥 신경 쓰랴, 집중과 판단력을 관장하는
전두엽이 오늘따라 고생이 많다.
거미와 두더지, 그리고 평화로운 얘네 나와바리를 범한 불청객이
벌이는 미묘한 신경전은 임도에 내려설 때까지 쭉 계속됐다.
비석삼거리를 지나고, 외포리와 고천리 갈림길을 지나고,
내가시장(외포리) 방향으로 난 숲길을 쉼없이 걸어
첫번째 임도와 맞닥뜨렸다.
건너편 나뭇가지에 산행리본이 눈에 띄었다.
임도를 가로질러 숲속으로 이어진 산길로 들어섰다.
그렇게 숲길을 500여미터나 걸었을까, 또다시 임도가 나타났다.
조금 전과는 달리 건너편 산자락을 살폈으나 산행리본 표식은 없다.
산길도 뚜렷치가 않다. 분명치 않은 산속으로 들어가 헤매기 보다는
확실한 임도를 따라 걷기로 맘 먹었다.
그런데 어느 쪽으로 가야 버스 타는 곳이 가까울까?
임도에 우두커니 서서 左와 右를 고민했다. 그래~ 복불복이다.
모자를 벗어 하늘로 던졌다.
바로 떨어지면 오른쪽, 뒤집어지면 왼쪽으로 갈 것이다.
바르게 떨어졌다. 오른쪽으로 걸었다. 과연 선택이 옳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