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소명월 교교하니 삼겹살맛 일품일세
다섯山友 둘러앉아 밤늦도록 희희낙락
낑낑대며 챙겨온酒 하룻밤새 거덜났네
혹시몰라 꼬불쳐둔 팩소주가 있긴한데
내일저녁 생각해서 바닥났다 시치미뚝
그제서야 주섬주섬 자리털고 일어나네
이른 새벽, 선잠에서 깨어 잠시 뒤척이다 침상을 빠져나왔다.
푸른빛 새벽 어스름이 벽소령대피소를 감싸고 있다.
목구멍이 칼칼했다. 물을 길러 가기 위해 취사장 아래로 난 가파른
계단을 내려섰다. 장딴지는 뻐근하나 다행히 컨디션은 괜찮다.
샘터는 대피소로부터 200m 쯤 떨어져 있다.
목부터 축인 다음, 물통과 코펠에 가득 채웠다.
샘터에서 비누나 치약 사용은 물론 씻는 행위는 할 수 없다.
종주산행에서 물티슈는 필수다.
코펠을 비롯 설겆이는 물론 얼굴과 손 발 닦을 때 요긴하다.
서서히 산자락에 아침햇살이 번진다. 여유로운 아침이다.
아침 끼니는 햇반과 라면으로 간편 해결했다.
식후 커피가 빠질 수는 없다.
K가 바리스타를 자처하고 나섰다.
물의 양과 비등점 그리고 분말 투여 타이밍이 포인트라나…
그 성의가 가상하여 ‘천하의 어떤 바리스타도 흉내 못 낼
오묘한 맛’이라고, 극찬을 푸짐하게 날렸다.
달달한 커피로 텁텁함을 달랜 후 대피소를 나섰다.
벽소령에서부터 신벽소령 갈림길까지, 길은 평탄하다.
과거 무장공비 침투에 대비키 위해 만든 군사작전도로다.
지리산의 흉물이기도 한 이 도로도 조금씩 흔적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런 모습으로 복원되어가고 있어 다행이다.
작전도로는 신벽소령에서 주능선과 갈라져 음정마을로 이어진다.
평탄한 작전로를 버리고 숲길로 들어섰다.
덕평봉 산자락을 몇 구비 돌아드니 ‘선비샘’이다.
물 한 모금에 내장 깊숙이 서늘함이 전해진다.
산꾼들 사이에서 지리산 제일의 ‘오아시스’로 통한다.
선비샘을 지나 세석대피소까지는 된비알의 연속이다.
한 구비를 돌아들면 또 한 구비가 막아서고,
한 봉우리 올라서면 또 한 봉우리가 다가선다.
인내심이 한계치에 이를 때쯤, 장막이 열리듯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이처럼 지리산은 간간이 숨 막히게 아름다운 속살로
산객의 고단함을 보듬어 안는다.
칠선봉(1,558m)은 숨을 턱 끝까지 차오르게 하고
영신봉(1,652m)은 젖 먹던 힘까지 앗아 갔다.
낙남정맥이 분기하는 영신봉에 서니 세석대피소가 발아래다.
한반도의 척추, 백두대간에서 마지막으로 분기되는 산줄기가
낙남정맥이다. 이곳 영신봉에서 갈라져 경남의 수려한 봉우리들을
두루 일으켜 세운 뒤 낙동강 하구로 자맥질한다.
영신봉은 바람이 지나는 길목인가 보다. 목덜미를 훑고 지나는
한 줌 바람은 지친 삭신을 일으켜 세우는 청량제와도 같다.
세석평전과 촛대봉이 바짝 다가섰다.
칠선봉 지나기 전까지만 해도 시리게 파랗던 하늘이
세석평전에 이르자, 잿빛으로 변해버렸다.
세석대피소에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날씨 상황을 검색했다.
오늘밤부터 지리산 일대에 비를 동반한 강풍이 시작되어
내일 오후까지 계속 될 것이란 예보다.
애초 계획은 오늘 장터목대피소에 도착, 침상을 배정받아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 내일 새벽, 장터목을 출발해 천왕봉에 올라
지리 10경 중 제1경이라는 일출을 보고, 치밭목대피소 거쳐 대원사로 하산하는 것이다.
계획 수정이 불가피했다. 다섯 山友가 머릴 맞댔다.
– 대원사 방향은 포기하고 장터목에서 중산리로 하산한다.
– 내일 아침 비바람이 몰아친다하니 오늘 장터목에 배낭 내려놓고
천왕봉 올랐다가 장터목으로 유턴한다.
– 그리고 내일 아침, 여유있게 중산리 탐방센터로 하산한다.
대원사 방향으로 내려선다 하여 나섰는데… 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지리산을 첫 종주할 때 03시에 대원사를 출발해 깜깜한 산 속을
나홀로 걸어 어스름이 걷힐 무렵 치밭목산장에 닿아 따스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던 추억을 되새김해보고 싶었기에 내심 섭섭하기도 했다.
촛대봉(1,703.7m)에 서서 걸어온 능선과 가야할 능선을 굽어보나,
안타깝게도 그새 비구름에 갇혀 버렸다.
촛대봉에서 장터목대피소까지 2.7km, 천왕봉까지는 4.4Km이다.
지리산 최고의 비경을 간직하고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구간에 들어서자, 날씨가 심술이다.
지리산을 관장하시는 산신께서 요만큼만 허락하시니 도리 없다.
장터목대피소 지붕 위로 비안개가 자욱이 내려앉고 있다.
천왕봉 일출을 보기 위한 거점이라 늘 산객들로 붐빈다.
배낭을 내려놓고 서둘러 천왕봉으로 향했다.
어깻죽지가 가벼우니 몸과 마음은 새털 같다.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서면 제석봉(1,808m)까지 목책길이 이어진다.
군데군데 고사목은 세월의 무상함을 그대로 전한다.
제석봉 산자락은 6.25 직후까지만 해도 울창한 숲이었으나 도벌꾼들이
그 흔적을 없애기 위해 불을 질러 타다 남은 구상나무에
세월이 녹아들어 지금의 고사목이 된 것이란다.
제석봉 고사목지대를 지나 하늘로 통하는 문, 통천문에 이르자,
짙은 비안개는 바람에 실려 급습과 물러남을 거듭하며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신비로움을 펼쳐 보이고 있다.
그렇게 다섯山友는 운무에 갇혀 버린 천왕봉(1915m)에 섰다.
인증샷을 남기기 위해선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려야하는
수고는 감수해야 한다.
천왕봉 정상에서의 인증샷을 보면 한결같이 판박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진 찍는 이가 피사체(정상 표시석)에서
2미터 이상 물러 설 수 없다. 뒤는 바위벼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안전을 이유로 정상석을 몇 미터 옮겨 놓아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는 모양이다.
일정 간격을 두고 정상석을 하나 더 세우는 것은 어떨까?
천왕봉에서의 명품 조망은 끝내 허락 치 않았다.
지리산에 첫 발걸음 한 P와 K는 못내 아쉬워하는 표정이다.
“지리 산신께서는 단 한번 걸음에 지리산의 전부를 보여주지 않는다네. 두어번 더 걸음 하라는 뜻이 숨어 있으니 다음을 도모하세.”
장터목대피소로 서둘러 유턴했다.
침상을 배정 받고나서 먹을거리를 챙겨들고 야외 식탁으로 나왔다.
바람이 거세다. 어제처럼 야외 식탁을 이용하기엔 무리다.
그런 이유로 실내 취사장은 이미 초만원이다. 겨우 비집고 자릴 잡았다.
남은 먹을거리들을 탈탈 털어 끓는 물에 집어넣었다.
궁극의 조미료는 천하의 쉐프도 울고 간다는 ‘라면스프’다.
국적불명의 잡탕찌개를 가운데 두고 다섯 산우가 둘러앉았다.
꼬불쳐 뒀던 팩소주의 진가는 대단했다.
가여우리만치 소주 한 방울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그렇게 장터목대피소의 밤은 속절없이 깊어갔다.
다음날 아침(5월 3일)
장터목에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몸을 가누기 쉽지 않다.
어제 천왕봉을 찍은 것이나 하산코스를 바꾼 것은 옳았다.
귀경 버스는 중산리탐방센터 옆 거북이식당에서 14시에 출발한다.
그 이전에 중산리로 내려서면 되기에 서두를 필요가 없다.
비바람이 거칠게 요동치나 ‘믹스커피’의 느긋함이 먼저다.
달달한 커피를 음미하며 좀 더 여유를 부린다.
산에 들어가면
– 장영희
발소리 내지 않고
몰래 산에 들어가
세상에서 입은 옷을 벗고
그늘 속 이끼가 되어
엎드려 있어도
바람의 자유를 안다
이끼가 먹고사는 고독의 맛을 안다
키 큰 나무는
내 한숨 다 들이마시고
한숨 뱉아 낸 만큼
나는 나무가 되고
산에 들어가면
바위와 나무와
산새와 이끼가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는지
바람이 전해준다
**
시인 장영희(부산대 겸임 교수)는 필자의 오랜 친구다.
지리산을 열여섯번이나 종주했을 만큼 산 마니아다.
山詩 한 편 부탁했더니 흔쾌히 보내 왔다.
**
우의를 뒤집어 쓴 채 장터목대피소를 벗어나 중산리 방향으로 내려섰다.
거친 바람은 이내 잦아들었으나 빗줄기는 여전히 세차다.
계류는 그새 무섭게 불어나 으르렁거렸다.
계곡을 따라 걷는 내내 비가 멎지 않는 통에 장터목에서 중산리까지
5.3km를 쉬지 않고 줄곧 걸을 수밖에…
땀과 빗물이 뒤섞여 온 몸이 꿉꿉했다. 우의는 입으나 마나다.
기능성 방수신발 역시 줄기차게 내리는 빗속에선 대책 없다.
칼바위 삼거리(장터목 4.0km, 천왕봉 4.1km, 중산리 1.3km)를 지나
중산리탐방센터 옆, ‘거북이식당’에 닿은 시간은 11시.
곧장 거북이식당에서 제공해 준 샤워장으로 들어갔다.
말이 샤워장이지 언감생심, 온수는 바라지도 않았다.
찬 물이라도 콸콸 나왔으면 좋으련만…(공짜인데 감사해야지 무슨!)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섯 山友는 용케도 샤워를 끝내고
뽀송뽀송한 모습으로 둘러앉아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안주 삼아
애꿎은 막걸리 항아리만 거푸 동을 내고 말았으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