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사람은 못 만나서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는 佛家의 가르침은 인간사에서 겪게 되는 갈등이 그 만큼 많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사회생활에서의 만남은 자신의 노력에 따라서 어느 정도 갈등의 기회를 줄 일수도 있겠지만 인연(因緣)이라는 끈으로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사는 가정에서는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방법이야 없는것은 아니겠지만 가끔은 입장을 바꾸어 상대를 바라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의도적인 노력은 때때로 갈등해소의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현재 수학박사(數學博士)인 남편과 남편의 눈높이에 한참(?)을 미치지 못하는 고등학교 3학년인 아들과의 갈등 사이에 있다는 어머니가 방문하였다. 수년째 접어든 갈등이 이제는 극에 달해 더 이상 한 지붕 아래서 사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다.

수학박사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아버지는 타고난 머리와 공부자리가 좋음을 알 수가 있다.

남편과 아들의 명국을 살펴보니 사실 어머니의 말처럼 서로간의 갈등이라고 보기보다 아버지의 강요(强要)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관계이다.

갈등이라는 표현은 서로 사주의 격이나 사회적 위치가 동등할 때나 어울리는 말이지 마치 호랑이 앞에 있는 사슴과 같은 모습이라 아버지의 위상이나 카리스마에 사슴 같은 아들은 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머리는 좋았지만 공부자리가 없었던 아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아버지의 이해와 기다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시험 결과물에만 관심을 보였다.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았기에 아들에 대한 생각에 잣대도 어쩌면 당연한 모습이었지만 그 결과는 갈등과 아들의 사기저하 뿐이었다. 결국 아들은 아버지가 원하는 전문직인 아닌 기술직의 직업학교에나 갈수 밖에 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중학교 때까지는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던 아들이었다.

전교권에서만 놀던 아들은 이렇게 실력이 떨어지니 상대적 박탈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 결과 집 보다는 바깥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매일 보지 않으면 아들과 남편사이가 좀 나아질까 하는 기대감으로 어머니는 남편과 상의 끝에 주말부부가 되어 아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였지만 한번 벌어진 사이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자녀의 타고난 머리와 학습의 결과물과의 상호관계는 고학년이 될 수록 크게 차이가 난다. ​머리가 뛰어나지 않더라도 공부자리가 좋은 아이는 믿고 기다려주면 결국 대기만성의 결과를 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머리만 좋고 공부자리가 없는 아이들은 종종 고학년에 올라가 학업에 대한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이럴 때 경험하는 좌절이 어떤 식으로 치유되는가에 따라 대학 진학의 결과 또한 당연히 달라진다. ​

아버지처럼 머리가 좋고 공부자리가 좋은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생각과 행동방식 특히 공부나 학업에 대하여 자신의 방식이 당연하다는 ​결론을 가지고 자식을 대하기 쉽다.



아들의 경우에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자리가 약한 경우였다. 당장의 결과보다는 기다리는 마음을 가지고 아들을 대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누구보다도 좋은 결과를 내고 싶었던 사람은 아들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버지의 큰 문제는 아들에 대한 기준을 자신의 잣대로 정해 놓고 자신의 위세를 굳이 아들에게까지 강요한다는 데 있었다.

남편과 아들의 갈등 속에서 그 누구편도 되어줄 수 없었던 어머니는 급기야 병을 얻어 수술까지 하게 되었다. 훌쩍이며 털어놓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쉬움은 더해진다..



자식을 키우는 모든 부모님들은 혹시 내 자식과 나의 사고방식이 다른 것 같다면 자식에게 자신의 고집과 경험만을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

때때로 아이의 입장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내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도 가져야 한다. 어린 시절을 경험한 부모와 아직 부모가 되 보지 않은 자녀들의 생각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자녀와 생각의 다름을 다르다고 인정하는 부모는 적어도 다른것을 틀리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많은 요즘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