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龍ケ原濕原’과 ‘賽の河原’을 걷다]


새벽 4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다.
어젯저녁 일찍 잠에 든 때문일까, 아니면 어릴 적 소풍 전날처럼
설렘 때문에 잠을 설쳐서일까, 알람에 의지해 잠을 깨던 평소와 달리
밤새 자는 둥 마는 둥 새벽을 맞은 것이다.
바깥 날씨가 궁금했다.
살그머니 일어나 커튼을 들춰 아직은 어둑한 바깥을 살폈다.
어젯밤 조금씩 흩뿌리던 비는 멈췄고 창 밖으로 보이는 숲 저편 능선과 맞닿은
하늘금이 뚜렷했다. 안개마저 싹  걷혀 가시거리도 정말 좋을 듯 싶다.

인기척에 知己 K가 몸을 뒤척이며 묻는다.
“날씨 어때?”
망설임 없이 답했다.
“장담 컨데 쥑인다!”




05시, 기상 알람이 뒷북을 친다. 이미 일어났는데…
롤커튼을 완전히 당겨 올렸다.
순간, 그림처럼 다가선 창밖 풍경에 절로 탄성이 새어 나왔다.
하얀 구름을 휘감은 거대 산봉이 존재감을 과시하며 손짓한다.
바로 일본 東北지역 최고의 명산 초카이산(2236m)이다.
태풍 ‘아타우’가 쓸고간 뒤라 하늘은 더없이 청명하다.

봉우리가 후지산(富士山)을 빼닮아 데와후지(出羽富士)라 불리기도 한다더니
아닌 게 아니라 그림에서 많이 보던 후지산의 판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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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스토초카이호텔’에서 준비한 도시락과 오차를 받아 배낭에 챙겼다.
숙소에서 버스로 20여 분을 달려 ‘야시마구찌((矢島口)’에 닿았다.
이곳은 車道 종점이자, 산길걷기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버스에서 내리자, 알싸한 한 줌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서늘한 느낌이다.
이곳은 해발 1,180m로, 정상까지 표고차는 1,056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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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구름은 바람에 떠밀려 이리저리 은발처럼 풀어졌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길 거듭하며 파아란 하늘 공간을 넓혀가고 있다.
날씨 걱정은 내려놓아도 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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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산행에 앞서 들머리 주차장에 빙 둘러선 채 다함께 스트레칭을 했다.
일행 중 前 체육학과 교수였다는 분의 구령과 동작에 따랐다.
준비운동 없이 장시간 다리근육을 혹사시켰다가 쥐가 나기도 했었고
근육파열도 경험해 본 터라 동작을 열심히 따라 했다.

일행 32명 중 23명만 초카이산 종주에 나선다.
나머지 9명은 초카이 호수 주변 트레킹이다.
산행은 9시간, 트레킹은 4시간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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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산악가이드 두분(왼쪽에서부터 하타나키氏, 사토氏)
산길 안내는 현지인 두 분. 선두는 하타나키氏, 후미는 사토氏가 맡았다.
하타나키氏는 정해진 등로를 벗어나지 말 것과 선두를 앞지르지 말 것을
일행들에게 당부한 후 느리디 느린 걸음으로 출발했다.
이번 초카이산행을 기획한 브라이트스푼 김용균 대표가 산악가이드의
느린 걸음에 대해 부연 설명했다.

“30분 정도는 느리게 몸의 컨디션을 끌어올린 다음 조금씩
보행 속도를 낼 겁니다. 답답하더라도 따르도록 합시다”

선두 가이드, 하타나키氏의 걸음걸이는 마치 물 위를 걷는 듯 특이하다.
무릎에 전혀 무리가 가지 않을 것 같은 신통방통한 걸음이라 너나없이
신기해하며 그의 보행법을 따라 해보지만 어림없다.
‘사뿐사뿐’ 독특한 보행은 산행 내내 흐트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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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5분을 걸었을까, 가을빛이 스미는 초원이 시야에 가득하다.
五合目에 있는 고원 습지초원이다.
이곳은 일본 환경성이 선정한 일본의 중요 습지 500 곳 중 하나이다.
습원(濕原)을 가로질러 놓인 木道 주변엔 자주빛 용담을 비롯해
이름 모를 꽃들이 낯가림 없이 객을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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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원을 지나 숲에 들어서면 길목에 냉천이 솟는 연못과 함석판을 이어 지은
조그맣고 허름한 神社를 맞닥뜨리게 된다. 일본  어딜가나 신사는 있다.
초대형 규모에서부터 이처럼 깜찍한? 신사까지 일본의 총 신사 숫자는
약 8만여 개에 달한다고 한다.
옛날에는 초카이산을 향하는 산객이 이곳 신사에 기원하고
냉천으로 몸을 정결히 한 후 등산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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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合目 이정표에 ‘賽の河原’라 쓰여 있다. ‘사이노가와라’로 읽는다.
‘죽은 아이가 건너가는 강이 흐르는 자갈밭’을 의미한다.
일본엔 이처럼 섬뜩한 의미를 지닌 지명이 더러 있나보다.
몇 년 전 다녀온 일본의 어느 계곡이름은 ‘鬼の舌震(오니노시타브루)’였다.
직역하자면 ‘귀신의 혀 떨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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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합목 이정표를 지나자, 검은 돌무더기가 골짜기를 따라 길게 흩어져 뒹구는
너덜길이 시작됐다. 눈 녹은 물이 이 골짜기로 흘러들면…..
옳거니, 왜 ‘사이노가와라’라 이름 붙였는지 짐작이 간다.

아름다운 산길과 지명을 때로는 이처럼 섬뜩하게도 표현하는 모양인데
알량한 머리로는 이해불가다. 일본 문화에 대한 무지일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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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스스한 너덜길, ‘賽の河原’을 벗어나면 또다시 습지 초원이 펼쳐진다.
야생화 보호를 위해 깔아놓은 오래된 목도가 운치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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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산행엔 스님 두 분이 동행했다.

바랑 대신 배낭을, 등산모 대신 흰수건을, 고무신 대신 등산화를 신었다.
하지만 기능성 등산복은 마다하고 승복을 고수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가 간간이 저만치 떨어져 가부좌 참선을 행할 때면
영락없이 깊은 산사, 진중한 스님의 카리스마가 엿보이지만
일행 틈에 섞여 웃고 이야기할 땐 장난기 가득한 범부와 다름없으니…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