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아티카라는 곳에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악당이 있었다.

이 악당은 여행자가 지나가면 꾀를 내어 자신의 소굴로 끌어들여 특별한 침대에 눕혀 여행자의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잡아서 늘이고 반대로 너무 크면 침대 밖으로 나온 다리를 잘라버렸다고 한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이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그러나 침대의 길이와 키가 꼭 같았던 영웅 테세우스가 나타나서 반대로 프로크루스테스를 자신이 했던 것과 똑 같은 방법으로 죽이고 만다.

이처럼 자기 자신이 어떤 절대적인 기준을 정해 놓고 모든 현상을 정해 놓은 기준에다 맞추는 것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고 한다.



인생의 행불행(幸不幸)은 남과 비교에서 생겨나고 부모와 자녀 사이의 행복과 불행은 서로가 바라보는 곳이 다를때 생겨난다.

서로가 바라보는 곳이 한곳으로 집중되면 자녀의 학년이 올라갈수록 서로의 유대관계는 깊어지고 정서적으로도 안정이 된다. 아이의 학창시절은 인생의 밑거름이 되는 가치 있고 소중한 시간이 되겠지만 반대로 서로의 방향이 다른 곳이라면 각도의 차이 만큼이나 갈등의 시간이 되고 만다.

타고난 달란트가 공부자리에 집중되어 있는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가 공부를 잘하여 명문대를 가기를 바란다. 아이의 달란트도 어머니와 같다면 주위에서 부러워하는 엄친아로서 큰 갈등 없이 학창시절을 보낼 수가 있다.

다른 모습도 있다. 서로의 달란트가 다를 때이다. 아이의 달란트가 공부자리보다는 기타 다른자리에 집중되어 있다면 어머니와 아이는 서로간에 추구하는 바가 다르므로 갈등은 언제든지 터질 수 밖에 없는 마치 준비된 시한폭탄과 같다.



이렇듯 부모와 자식사이에 생기는 갈등이란 서로의 달란트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못해 생기는 결과물이다. 물론 해답은 나와있다. 누군가가 이해하고 인정하고 양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란 바로 부모이다.

사실 주위에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부모들의 의지로 자신의 삶이 강요되는 아이들이 많아 이로 인한 갈등으로 소아 정신과 상담과 치료를 받는 학생들이 제법 있다.

몇 일전 대치동에서 살고 있다는 고등학교 2학년 딸을 둔 부모와의 상담은 부모와 자녀가 겪고 있는 대표적 갈등 사례였다.

명문대 졸업에 공부가 달란트인 경쟁심 강한 어머니와 학업과 규칙 그리고 명분이 삶의 방침이었던 아버지는 오십이라는 인생의 시간만큼이나 생각이 굳어져 있었다.

이에 반해 여러 가지 달란트를 가지고 있는 고2 학생인 딸은 부모의 바램과는 달리 공부보다는 다른 분야에 관심이 더 커 향후 대학 진학 문제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한시절 먹고 살기 힘들어 배움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던 우리의 부모님들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은 소리가 바로 ‘내 새끼 목구멍으로 밥 넘어 가는 소리’와 ‘자식이 경읽는 소리’였다

시대가 변하니 부모가 듣는 소리 또한 달라졌다. 이제는 내 자식 소리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남의 자식 소리도 듣게 되었고 자연히 비교(比較)라는 갈등의 그림자도 더불어 나타나는 시절이 된 것이다.

경쟁심과 주관이 강하였던 부모 역시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 예외일수 없었다. 제법 공부를 한다는 모임에서 고등학교 1학년때 까지만해도 상위권을 유지하던 아이가 언제부터인가 공부보다는 다른분야에 관심을 보이며 성적이 자꾸 쳐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담시간이 제법 흐르고 부모 자신들과 자녀의 차이점을 하나씩 공감하자 어머니는 간간히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라는 어머니의 마지막 말에 필자 역시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인지라 잠시 희망을 가져보지만,

문득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말이 떠오르는 것은 타고난 기질과 거기에 더해진 인생이라는 고집(固執)은 여간해서는 변하지 않았던 여러 경험이 주는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