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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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이라는 명사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일반적 의미로는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앎”이라고 되어 있고 심리적 의미로는 “인지, 즉 자극을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일련의 정신과정”이라고 되어 있다. 또 철학적 의미로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사물에 대해여 가지는 그것이 진(眞)이라고 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개념, 또는 그것을 얻는 과정”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인식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인간은 사색을 하고 학문을 하고 탐구를 한다. 인식을 바로 세운다는 것은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안다는 것에서 나아가 그 사물의 옳고 그름에 따라 실천하는 것까지를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앎이라고 말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너무나 혼란스럽다. 인간에게 과연 인식이라는 장치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라는 의문은 부정의 또 다른 부정을 낳는다. 그나마 믿고 있던 장치들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그 실체는 경악을 금치 못할 지경이다.
우리들의 아픈 현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예전 사건들까지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현재로도 너무나 차고 넘치니 그렇다. 연일 터지는 조현병이 의심된다는 묻지 마 살인 사건들, 평택 계모의 원영이 살인 사건, 서울대생 단톡방 성희롱 사건, 존속살인과 청부살인에서 교육부 나향욱 정책기획관의 “민중은 개돼지”발언에 이어 홍준표 지사의 쓰레기 개 발언까지. 연예인들의 성매매 정도는 어쩌면 그럴 수 있다고 묵인되어 버릴 만큼 우리 사회는 너무나 큰 혼란에 빠져 있다. 가치관의 혼란! 오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력은 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오직 자기만 남아 그 속에 매몰되었다. 나르시즘의 위기는 과거보다 현재가 몇 십 배는 더 한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모든 것들은 뿌린 씨앗의 결과요 인과응보(因果應報)다.
원영이 계모는 자신도 과거에 학대 받았다고 스스로를 옹호한다. 서울대생 아이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이 시대의 가슴 아픈 미래의 표상이다. 그 무엇도 못 해보고 오직 공부만 했다. 나향욱 이 나라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희망의 선봉이요 최고의 권력자로 누리고 또 누리다 보니 자신이 나르시즘에 빠져 있다는 사실 조차 망각했으리라. 연예인 박유천의 삶을 어찌 그 개인 혼자만의 어리석음이라 치부할 수 있겠는가! 사회가 미쳐 돌아가고 있으니 조현병(調絃炳)이 생기는 것이 어쩌면 정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들의 미친 행동을 보면서 섬뜩 하게도 나도! 라는 동기부여마저 일게 하는 현실이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들이 나날이 더욱 포악해 지고 다양화 되고 만연해 지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서서히 무뎌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늘을 훔치는 도둑을 보고 심각성을 이야기 하는 것은 너무 오래된 쾌쾌묵은 감정이 되었다. 사람을 죽여 토막을 내어 산이고 강이고 내키는 대로 내다 버리고 인격을 말살하고 가치를 파괴하는 막말을 쏟아 내고 그에 걸 맞는 파렴치한 행동을 하는 것이 바늘을 훔치는 정도의 사건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 같은 현실을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토악질이 나고 패악을 부리고 분노를 넘어선 감정을 토해내도 시원치 않다는 것이 지금 우리는 죽을 만큼 괴로운 것이다.
어디부터 손을 대어야 할지 모를 이 끝 간 데 없는 막연함에 숨이 막혀 온다. 마치 이제는 생명 줄을 놓아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오히려 편안함으로 돌려보내는 생의 마지막을 맞이해야 할 것 같은 소망마저 꿈틀거린다. 희망은 있는가! 누가 그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가! 용기 있는 자 그것은 그대의 몫이 될 것이다.
인식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인간은 사색을 하고 학문을 하고 탐구를 한다. 인식을 바로 세운다는 것은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안다는 것에서 나아가 그 사물의 옳고 그름에 따라 실천하는 것까지를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앎이라고 말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너무나 혼란스럽다. 인간에게 과연 인식이라는 장치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라는 의문은 부정의 또 다른 부정을 낳는다. 그나마 믿고 있던 장치들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그 실체는 경악을 금치 못할 지경이다.
우리들의 아픈 현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예전 사건들까지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현재로도 너무나 차고 넘치니 그렇다. 연일 터지는 조현병이 의심된다는 묻지 마 살인 사건들, 평택 계모의 원영이 살인 사건, 서울대생 단톡방 성희롱 사건, 존속살인과 청부살인에서 교육부 나향욱 정책기획관의 “민중은 개돼지”발언에 이어 홍준표 지사의 쓰레기 개 발언까지. 연예인들의 성매매 정도는 어쩌면 그럴 수 있다고 묵인되어 버릴 만큼 우리 사회는 너무나 큰 혼란에 빠져 있다. 가치관의 혼란! 오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력은 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오직 자기만 남아 그 속에 매몰되었다. 나르시즘의 위기는 과거보다 현재가 몇 십 배는 더 한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모든 것들은 뿌린 씨앗의 결과요 인과응보(因果應報)다.
원영이 계모는 자신도 과거에 학대 받았다고 스스로를 옹호한다. 서울대생 아이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이 시대의 가슴 아픈 미래의 표상이다. 그 무엇도 못 해보고 오직 공부만 했다. 나향욱 이 나라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희망의 선봉이요 최고의 권력자로 누리고 또 누리다 보니 자신이 나르시즘에 빠져 있다는 사실 조차 망각했으리라. 연예인 박유천의 삶을 어찌 그 개인 혼자만의 어리석음이라 치부할 수 있겠는가! 사회가 미쳐 돌아가고 있으니 조현병(調絃炳)이 생기는 것이 어쩌면 정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들의 미친 행동을 보면서 섬뜩 하게도 나도! 라는 동기부여마저 일게 하는 현실이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들이 나날이 더욱 포악해 지고 다양화 되고 만연해 지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서서히 무뎌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늘을 훔치는 도둑을 보고 심각성을 이야기 하는 것은 너무 오래된 쾌쾌묵은 감정이 되었다. 사람을 죽여 토막을 내어 산이고 강이고 내키는 대로 내다 버리고 인격을 말살하고 가치를 파괴하는 막말을 쏟아 내고 그에 걸 맞는 파렴치한 행동을 하는 것이 바늘을 훔치는 정도의 사건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 같은 현실을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토악질이 나고 패악을 부리고 분노를 넘어선 감정을 토해내도 시원치 않다는 것이 지금 우리는 죽을 만큼 괴로운 것이다.
어디부터 손을 대어야 할지 모를 이 끝 간 데 없는 막연함에 숨이 막혀 온다. 마치 이제는 생명 줄을 놓아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오히려 편안함으로 돌려보내는 생의 마지막을 맞이해야 할 것 같은 소망마저 꿈틀거린다. 희망은 있는가! 누가 그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가! 용기 있는 자 그것은 그대의 몫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