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네트 89

                       윌리엄 셰익스피어




어떤 허물 때문에 나를 버린다고 하시면,

나는 그 허물을 더 과장하여 말하리라.

나를 절름발이라고 하시면 나는 곧 다리를 절으리라,

그대의 말에 구태여 변명 아니하며.

사랑을 바꾸고 싶어 그대가 구실을 만드는 것은

내가 날 욕되게 하는 것보다 절반도 날 욕되게 아니하도다.

그대의 뜻이라면 지금까지의 모든 관계를 청산하고,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보이게 하리라.

그대 가는 곳에는 아니 가리라.

내 입에 그대의 이름을 담지 않으리라.

불경한 내가 혹시 구면이라 아는 체하여

그대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그대를 위하여서는 나를 대적하여 싸우리라.

그대가 미워하는 사람을 나 또한 사랑할 수 없나니.



셰익스피어(1564~1616)의 소네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소네트란 일정한 운율과 형식을 갖춘 14줄짜리 사랑시. 13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돼 전 유럽으로 퍼졌다. 셰익스피어는 154편의 소네트를 남겼다. 이는 그의 4대 비극보다 더 애절하고 아름다워서 오늘날까지 수많은 연인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지고지순의 사랑. 그래서 ‘소네트 89번’의 마지막 두 행은 사랑의 숭고함을 가장 뛰어나게 묘사한 절창 중의 절창이다.

‘그대를 위하여서는 나를 대적하여 싸우리라./ 그대가 미워하는 사람을 나 또한 사랑할 수 없나니.’

셰익스피어는 ‘천 개의 마음을 가진 시인’이라는 극찬을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러브 스토리는 알려진 게 별로 없다. 1564년 영국 남부에서 태어나 열세 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집안일을 해야 했던 그가 열아홉 살 되던 해에 8세 연상의 앤 해서웨이라는 여인과 결혼했다는 사실만 확인됐다. 그는 대학도 다니지 못했다. 그런데도 타고난 언어 구사 능력과 무대예술 감각으로 최고의 극작가가 됐다.

그가 《소네트 시집》을 쓴 기간은 스물여덟 살에서 서른 살까지의 2년 남짓이었다. 결혼한 지 10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이 작품은 아내에게 바친 찬가였을까, 아니면 다른 여인에게 보낸 연가였을까.

시집의 내용은 한 시인과 귀족 청년, 검은 여인의 삼각관계를 다루고 있다. 젊은이와 검은 여인이 시인의 영혼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로 의인화돼 있는 게 특징이다. 지금이야 소네트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지만, 1609년 출간 당시에는 성관계에 대한 노골적인 암시 등 내용이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빛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시집이 출간됐을 때 그의 나이는 45세. 헌사에 나오는 헌정 대상 인물의 이니셜 W. H.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숱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아직 베일에 싸여 있다.

20세기 미국 평론가 해럴드 블룸 등 세계적인 연구자들이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을 완벽하게 발휘한 작품”이라고 극찬하면서도 소네트의 주인공을 밝혀내지 못했으니 ‘그대를 위하여서는 나를 대적하여 싸우리라’던 그의 절대적 사랑을 받았던 여인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