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한림원상 25년간 지원한 '과학계 키다리아저씨'
‘서정진 셀트리온그룹 명예회장, 삼성전자 김기남 부회장과 윤부근 고문, 조성진 전 LG전자 부회장, 안철수 전 안랩 대표, 고(故) 이민화 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

한국 공학기술 분야 최고 권위 단체인 한국공학한림원으로부터 ‘대상’ 및 ‘젊은 공학인상’을 받은 역대 수상자들이다. 공학한림원은 1997년부터 공학 관련 기술, 연구, 교육, 경영 부문에서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학기술인을 매년 선정해 시상한다. 대상 1명에게 1억원, 젊은 공학인상 2명에게 각각 5000만원을 준다.

공학한림원은 삼성전자 사장급과 서울대 학장도 회원 심사 과정에서 탈락시킬 정도로 엄격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공학한림원상이 산업기술계에서 가장 영예로운 상으로 꼽히는 이유다.

귀뚜라미그룹 창업주인 최진민 회장(사진)은 공학한림원의 숨은 지원자다. 지난 25년간 수상자 상금과 심사비 모두를 지원해왔다. 누적 지원액은 62억원에 달한다. 최 회장은 공학한림원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그는 “재정적인 것은 내가 부담할 테니 ‘한국판 노벨상’을 만들어 과학기술자를 육성하자”며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 이기준 전 서울대 총장, 김우식 전 연세대 총장 등과 의기투합해 1995년 공학한림원을 설립했다. 공학한림원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이사회 이사직을 설립 초기부터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최 회장과 귀뚜라미 측은 이런 기부 사실을 외부에 단 한 번도 알린 적이 없다. 과학기술계에선 소리없이 후원해온 그를 ‘키다리 아저씨’로 부르기도 한다.

최 회장이 후원을 결심한 배경에는 오랜 사업 경험에서 느낀 공학기술에 대한 갈증이 있다. 그가 보일러 사업을 시작한 1962년은 대부분 가정이 아궁이에 나무를 때서 난방을 하던 ‘구들장 온돌’ 시절이었다. 그는 온수를 순환해 난방할 수 있는 연탄보일러를 생산해 국내 최초로 아파트에 공급(서울 마포 공덕동)하기 시작했다. 이어 기름보일러와 가스보일러를 만들었고, 난방과 냉방 기술까지 융합해 회사를 키웠다.

최 회장은 “60여년 전 맨주먹으로 사업을 시작하면서 기술이 있지만 가난으로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기술 종사자들을 많이 만났다”며 “나중에 수익이 발생하면 반드시 공학기술 발전과 교육 지원 사업을 통해 사회에 환원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1960년대 가정용 보일러를 개발해 대량 생산하고 싶었지만 자동화된 기기가 없던 탓에 직접 설비를 고안해가며 어렵게 보일러를 만들었다. 이런 경험이 기술인 양성에 대한 신념으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최 회장은 “지금 젊은 세대는 1960~1970년대 기업인들이 느낀 기술 부족의 절망감을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선 과학기술 인재를 우대하는 사회 분위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공학기술인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작은 힘이라도 계속 보태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연매출 1조3000억원 규모인 귀뚜라미그룹은 지난 60여 년간 ‘무(無)차입 경영’을 고수하며,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때에도 인력 구조조정을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최 회장은 이익의 사회 환원에도 앞장서고 있다. 사재를 출연해 설립한 귀뚜라미문화재단과 귀뚜라미복지재단을 통해 지난 36년간 450억원을 들여 다양한 사회공헌 사업을 해왔다. 저소득 가정 자녀, 소년·소녀 가장 등 5만 명의 장학생에게 284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최 회장 스스로는 평생 운전기사를 두지 않고 2000㏄급 차량을 직접 몰고 다닌다.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