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 천하를 잡은 세 가지 비결은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올 여름 주말마다 일본의 주말 대하 드라마가 기다려진다. 공영방송 NHK의 일요 저녁 드라마 ‘간베’는 20일에 이어 27일 전국시대의 천하통일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일본이 국내외로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활약상을 보여준다.
수도(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최전선에 있던 히데요시가 어떻게 천하를 잡았을까. 교토에 있던 주군 오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으로 급작스레 죽으면서 발생한 정국 대혼란기. 히데요시가 긴급 사태를 맞아 군사인 구로다 간베의 조언을 받아 정국의 실세로 떠오른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도요토 미 히데요시가 누구인가. 전국시대의 3대 영웅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지장이다. 히데요시는 일본의 서민들로부터 특히 인기가 높다. 히데요시는 미천한 졸병 신분에서 일어나 전국 통일의 주역으로 성장한다.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원흉으로 알려진 인물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가 큰 전투를 치러가면서 천하를 잡아가는 순간들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치열한 경쟁 아래 살아가는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
‘혼 노지(本能寺)의 변(變)’이 일어났을 당시 오다 노부나가의 주요 장수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노부나가의 죽음을 안 히데요시와 간베는 미쓰히데를 토벌하고 최종 승리를 거둔다. 전장터에 있던 히데요시군이 교토로 말머리를 돌려 아케치 미쓰히데군을 무찌르는 과정은 극적이다.
아케치 미쓰히데가 노부나가를 공격한 건 1582년 6월2일 새벽. 당시 히데요시는 다카마츠(高松)성에서 적군 ‘모리’ 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도요토미 2만5000명을 비롯해 10여만 명의 병졸을 갖고 있었다. 숫적으론 미쓰히데의 1만3000명은 상대가 되지 않는 규모였다.
미쓰히데가 교토의 전투병으로 잠시 정권을 잡는 듯했다. 노부나가의 직속 병졸들 모두 동서남북의 먼 전선으로 흩어져 위기 상황 때 도움이 되지 못했다. 미쓰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 수 있었던 점은 이런 전투 상황 때문에 가능했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분석이다. 다만 미쓰히데는 200km 밖 전쟁터에 있던 히데요시가 다카마쓰성을 공격하는 한편으론 물밑에서 강화협상을 하고 있었다는 상황을 간과하고 있었다. 미쓰히데의 패착이 시작된다.
< 6일간 200km 스피드로 승부수 >
히데요시는 전선에 나가 있으면서도 교토와 오사카에서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곧 연락이 닿도록 정보전달 루트를 구축해 두고 있었다. 그는 2일 새벽 교토에서 발생한 모반 사건을 200km 이상 떨어진 장소에서 3일 밤 알았다. 당시의 도로, 통신 상항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 피숩 사건을 전해들은 즉시 모리군과의 강화 협상에 들어가 반격 작전을 시작했다.
해데요시는 다음 날 강화협상을 마무리하고 6일 교토를 향해 출병했다. 당시 무장군의 하루 평균 행군 거리는 20km 정도. 히데요시군은 6일 만에 200km를 주파했다. 미쓰히데는 히데요시군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진군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승리에 도취돼 있었다. 미쓰히데군은 교토 인근에 히데요시군이 도착한 사실을 안 뒤 패낵상태에 빠졌다. 히데요시의 스피드에 허를 찔렸다.
< 전투는 힘이 아니라 머리로 한다 >
히 데요시의 군사 간베는 모리와의 강화협상에서 모리의 ‘군기’를 20여개 빌렸다. 간베는 미쓰히데와의 전투를 대비해 머릿속에 냉정하게 향후 작전계획을 짠 것. 히데요시군 선두에 모리의 깃발을 내걸어 모리군의 지원을 받는 것처럼 꾸몄다. 적군의 사기를 꺾기 위한 심리전이다. 전선을 출발할 때 2만5000명이던 히데요시군은 미쓰히데군과의 전투 시점에 4만 명으로 늘게 된다.
이에 비해 미쓰히데군은 1만3000명 그대로였다. 히데요시군이 다가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군사들의 공포가 커졌다. 사기는꺾이고 도망자들이 늘면서 군사수도 줄었다. 양군이 싸우기도 전에 전투의 승패는 사실상 결정났다.
히 데요시는 교토로 출병하면서 젊은 장수들에게 “전투는 힘으로 이기는 게 아니라 머리로 이기는 거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전투군 편성 때도 오다의 아들을 총대장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주군의 아들을 배려하는 모양세를 취하면서도 전투 승리 후 정국 주도권을 갖기 위한 치밀한 사전 전략에 따른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전국시대를 끝내고 일본의 통일시대를 가져온 주인공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의 철저한 사태 파악과 정보수집 능력, 치밀한 작전 전략, 결단력있는 행동력이 위기 국면에서 힘을 발휘했다.
한경닷컴 최인한 뉴스국장 janus@hankyung.com
수도(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최전선에 있던 히데요시가 어떻게 천하를 잡았을까. 교토에 있던 주군 오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으로 급작스레 죽으면서 발생한 정국 대혼란기. 히데요시가 긴급 사태를 맞아 군사인 구로다 간베의 조언을 받아 정국의 실세로 떠오른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도요토 미 히데요시가 누구인가. 전국시대의 3대 영웅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지장이다. 히데요시는 일본의 서민들로부터 특히 인기가 높다. 히데요시는 미천한 졸병 신분에서 일어나 전국 통일의 주역으로 성장한다.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원흉으로 알려진 인물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가 큰 전투를 치러가면서 천하를 잡아가는 순간들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치열한 경쟁 아래 살아가는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
‘혼 노지(本能寺)의 변(變)’이 일어났을 당시 오다 노부나가의 주요 장수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노부나가의 죽음을 안 히데요시와 간베는 미쓰히데를 토벌하고 최종 승리를 거둔다. 전장터에 있던 히데요시군이 교토로 말머리를 돌려 아케치 미쓰히데군을 무찌르는 과정은 극적이다.
아케치 미쓰히데가 노부나가를 공격한 건 1582년 6월2일 새벽. 당시 히데요시는 다카마츠(高松)성에서 적군 ‘모리’ 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도요토미 2만5000명을 비롯해 10여만 명의 병졸을 갖고 있었다. 숫적으론 미쓰히데의 1만3000명은 상대가 되지 않는 규모였다.
미쓰히데가 교토의 전투병으로 잠시 정권을 잡는 듯했다. 노부나가의 직속 병졸들 모두 동서남북의 먼 전선으로 흩어져 위기 상황 때 도움이 되지 못했다. 미쓰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 수 있었던 점은 이런 전투 상황 때문에 가능했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분석이다. 다만 미쓰히데는 200km 밖 전쟁터에 있던 히데요시가 다카마쓰성을 공격하는 한편으론 물밑에서 강화협상을 하고 있었다는 상황을 간과하고 있었다. 미쓰히데의 패착이 시작된다.
< 6일간 200km 스피드로 승부수 >
히데요시는 전선에 나가 있으면서도 교토와 오사카에서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곧 연락이 닿도록 정보전달 루트를 구축해 두고 있었다. 그는 2일 새벽 교토에서 발생한 모반 사건을 200km 이상 떨어진 장소에서 3일 밤 알았다. 당시의 도로, 통신 상항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 피숩 사건을 전해들은 즉시 모리군과의 강화 협상에 들어가 반격 작전을 시작했다.
해데요시는 다음 날 강화협상을 마무리하고 6일 교토를 향해 출병했다. 당시 무장군의 하루 평균 행군 거리는 20km 정도. 히데요시군은 6일 만에 200km를 주파했다. 미쓰히데는 히데요시군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진군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승리에 도취돼 있었다. 미쓰히데군은 교토 인근에 히데요시군이 도착한 사실을 안 뒤 패낵상태에 빠졌다. 히데요시의 스피드에 허를 찔렸다.
< 전투는 힘이 아니라 머리로 한다 >
히 데요시의 군사 간베는 모리와의 강화협상에서 모리의 ‘군기’를 20여개 빌렸다. 간베는 미쓰히데와의 전투를 대비해 머릿속에 냉정하게 향후 작전계획을 짠 것. 히데요시군 선두에 모리의 깃발을 내걸어 모리군의 지원을 받는 것처럼 꾸몄다. 적군의 사기를 꺾기 위한 심리전이다. 전선을 출발할 때 2만5000명이던 히데요시군은 미쓰히데군과의 전투 시점에 4만 명으로 늘게 된다.
이에 비해 미쓰히데군은 1만3000명 그대로였다. 히데요시군이 다가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군사들의 공포가 커졌다. 사기는꺾이고 도망자들이 늘면서 군사수도 줄었다. 양군이 싸우기도 전에 전투의 승패는 사실상 결정났다.
히 데요시는 교토로 출병하면서 젊은 장수들에게 “전투는 힘으로 이기는 게 아니라 머리로 이기는 거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전투군 편성 때도 오다의 아들을 총대장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주군의 아들을 배려하는 모양세를 취하면서도 전투 승리 후 정국 주도권을 갖기 위한 치밀한 사전 전략에 따른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전국시대를 끝내고 일본의 통일시대를 가져온 주인공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의 철저한 사태 파악과 정보수집 능력, 치밀한 작전 전략, 결단력있는 행동력이 위기 국면에서 힘을 발휘했다.
한경닷컴 최인한 뉴스국장 jan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