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복장을 하자니 좀 썰렁할 것 같고, 그렇다고 겨울 복장은 좀 이른 듯 싶고..
가을과 겨울의 경계라 겨울용품 수납함을 열어 요것조것 만지작거리다가
인터넷에 접속해 실시간으로 올라온 산 사진들을 검색해 보았다.
얼마 전 내린 눈이 쌓여 강원 고봉들의 정수리는 그새 하얗다.
일요산행지로 점찍은 월악영봉 역시 응달진 곳은 희끗희끗 했다.

두터운 기모셔츠와 한겨울용 방한재킷, 그리고 방한모와 방한장갑에
아이젠, 스패츠까지 꺼내 펼쳐놓고 보니, 완전 한겨울이다.

절로 썩소가 번진다. 이게 지금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고봉에 눈발 조금 흩날린 걸 가지고 지레 엄살을 떠나.
또 기온 조금 내려간 걸 가지고 왜이리 설레발인가.
분명한 건 늦가을이다. 겨울용 복장과 용품은 아직은 아니다.

펼쳐놓은 겨울용품들을 모조리 수납함에 도로 집어넣었다.
혹시 몰라 두툼한 기모셔츠와 ‘비니’는 배낭 안에 챙겨 넣었다.
악산으로 익히 알려진 곳이라 10m짜리 비상용 로프는 챙겼다.
누룽지 데울 온수통과 생수, 컵누룽지와 귤 너댓알도 넣었다.
간이의자와 무릎보호대, 구급약품 백 그리고 잡다한 몇가지를 더하니
얼추 배낭의 각은 뽀대나게 잡혔다.

윗도리는 짚업셔츠에 얇은 기능성 3레이어 재킷을 걸쳤다.
아랫도리는 신축성 있는 천을 덧댄 가을 바지를 고수했다.

올 2월 초, 월악산과 맞보고 있는 북바위산에 올랐다가
건너 보이는 장쾌한 월악영봉에 매료되어 냉큼 오겠다 다짐했었는데
이 산 저 산 기웃거리다 보니 이제서야 찾아나서게 된 것.

산객을 가득 실은 버스는 서울을 출발해 고속도로, 국도, 지방도 순으로
노폭을 좁히더니 이젠 아예 교행도 안되는 산골짝 외길로 들어섰다.

지방도를 벗어나 신륵사 주차장까지 1.9km는 덩치 큰 버스가 달릴 길은 못된다.
워낙 소로라 교행도 어렵거니와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차체를 마구 할퀴는데도
기사는 아랑곳 않고 들이밀어 들머리인 신륵사주차장에 산객들을 쏟아냈다.
산골짝엔 서늘한 냉기가 감돈다.
길섶 갈색 수풀 위로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았다.
가을 끝 겨울 시작인 요맘 때엔 수은주가 -1만 돼도 춥다고 호들갑이다.
그래서일까, 앞서 걷는 산객들의 뒤태가 하나같이 둔중하다.
방한모에, 방한장갑 그리고 빵빵한 재킷에 두툼한 바지까지…
채 1km도 못가서 다 벗어 배낭에 구겨 넣을 것이다.

신륵사에서 영봉 찍고 덕주사 거쳐 덕주통제소까지 9.5km,
6시간 30분 소요된다고 입구 안내판에 표기되어 있다.
챙겨 온 등산지도에는 5시간 걸리는 걸로 적혀 있다.
어쨌거나 거리 대비 소요시간을 보니 ‘악’소리 나는 산임엔 틀림없는 듯.
주차장에서 50m를 걸어가면 오른 편에 신륵사가 나온다.
법주사의 말사인 이 절은 여느 절집과는 뭔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언제 누가 창건했고, 중창했으며, 소실되었고, 복원되었다’는
고찰의 한결같은 이력이, 여느 절과 다르단 얘기가 아니다.
‘사람 드는 게 싫다’는 것이 여느 절과 다르단 야그다.

“이곳은 수도하는 곳…출입을 일체 금합니다”

대체 수도하지 않는 절도 있나? 다 수도하며 방문객도 맞던데,
유독 이 절엔 ‘들어오지 말라’는 글귀가 곳곳에 나붙어 있다.
고려 초기에 만들어졌다는 삼층석탑(보물 1296호)과 문양史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알려진 이곳 극락전의 벽화와 단청이 보고 싶었는데, 이런!
철조망 너머 극락전 맞배지붕에 내려앉은 무서리만이 햇살에 반짝이며
객에게 눈길을 줄 뿐,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는 가람이다.
신륵사를 지나 ‘수렴선대’ 갈림길까지는 길이 비교적 완만하다.
신륵사 옛 큰 스님들이 참선 하였다는 ‘수렴선대’ 방향은 출입금지다.
험로라서 금하는지, 아니면 신륵사 출금과 같은 맥락인진 모르겠다.
들머리(주차장)에서 부터 1.5km를 걸었다. 앞서걷던 산객들,
예상대로 이쯤에서 하나둘 꺼풀을 벗는다.
여기서부터 된비알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한 줌 골바람이 지난다.
마지막 한 잎은 미세 바람 조차 힘겨운지 혼신을 다해보지만
계절의 변화 앞에선 어림없다.
수북히 쌓인 낙엽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린다.
낙엽은 다시 거름이 되어 신록을 잉태할 것이다.
팍팍한 된비알을 그렇게 코를 박고 올라 능선 마루에 섰다.
시야가 탁 트이며 영봉의 거대한 바윗덩이가 바짝 다가섰다.
간이의자를 펴고 앉아 초콜릿을 꺼내 물었다.
응달진 산비탈엔 잔설이 보인다. 첫 눈을 이렇게 봤다.
땀이 식으니 목덜미가 서늘하다. 등짝도 시렵다.
다시 영봉을 향해 발길을 재촉한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걷길 50여분, 거대 암벽이 길을 막아선다.
신륵사 삼거리다. 안내팻말은 왼쪽으로 덕주사(4.1km)를,
오른쪽으로 영봉(0.8km)을 가리킨다.
영봉에 올랐다가 다시 이곳까지 와서 덕주사 방향으로 하산하게 된다.
낙석으로부터 산객들을 보호하기 위해 암벽엔 그물 철망이 쳐져 있다.
고갤들어 암벽을 올려다 보았으나 덩치를 가늠키 어렵다.
코끼리 다리에 들러붙은 쇠파리 같다고나 할까.

오른쪽으로 난 철난간을 지나자, 곧추선 철계단이 고도를 확 떨군다.
응달진 북사면이라 내린 눈이 계단에 얼어붙어 신경이 곤두선다.
철계단 길은 둘레가 4km나 되는 영봉 바윗덩어리를 1/3 바퀴 정도
끼고 돌며 오르락 내리락 이어져 있다.
누군가 푸념했다.

“내려갈 땐 어질어질해 뒷걸음으로, 올라 붙을 땐 코가 계단에 닿을 만큼
철계단을 사다리 마냥 세워 놓았는지 모르겠어.
중국 황산처럼 암벽에 난간을 매달아 완만하게 오르도록 해놓을 것이지,
관계자들을 황산에 출장 보내, 노하우를 전수받아 오라 해야겠어”

그렇게 헉헉대며 계단과 사투?를 벌인 끝에 영봉 턱 밑 안부 쉼터에 닿았다.
쉼터가 시끌벅적하다. 영봉에 올랐다가 내려온 산객들이
자릴 잡고 앉아 산중오찬 삼매경에 빠져 있다.
영봉 정상이 눈앞에 빤히 모습을 드러냈다.

여세를 몰아 영봉 정상을 향해 암사면에 올라 붙었다.
그러나 암사면은 온통 얼어붙어 자칫 사고로 이어지기 십상이었다.
조심조심 용을 써가며 몇 미터나 올랐을까,
스텝이 꼬이면서 왼팔로 난간을 당겨 잡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러나 오래전 사고로 인해 왼쪽 팔에 후유장애가 있는 터라
당겨 잡을 수가 없어 진퇴양난으로 쩔쩔 매야만 했다.

어제 저녁, 배낭을 꾸리면서 꺼내 놓고 만지작거리다가
‘설마’하며 두고 온 ‘아이젠’ 생각이 간절했다.
해발 1천미터 넘는 고봉의 기온을 간과한 점, 스스로 자책할 수밖에.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 정상이 빤히 올려다 보이지만, 돌아섰다.
엉금엉금 안부쉼터로 내려섰다.

일행 중 혹시 아이젠을 갖고 온 사람은 없을까, 쉼터에서 수소문 해봤다.
용케도 있었다. 그렇게 건네받은 ‘아이젠’을 착용하고 다시 암사면에 붙었다.
낭떠러지에서 동아줄을 잡은 기분이 이럴까?
단숨에 ‘룰루랄라’ 정상에 올랐다. 정상엔 발 디딜 틈이 없다.
신령스러운 봉우리 靈峰(영봉)이 산객들로 인해 대략난감이다.
정상 인증샷을 위해 대기 중인 산객들 때문이다.
비좁은 암봉에 어렵사리 비집고 들어 사위를 조망한다. 그야말로 일망무제다.
중첩을 이룬 주변 산군은 월악영봉을 호위하듯 에워싸고
월악영봉은 이들을 호령하듯 기세등등한 폼새다.
중봉과 하봉 뒤로 설핏 드러난 청풍호의 물빛은 하늘을 담아 파랗다.
바다와 접해있지 않은 유일한 도, 충북에선 청풍호가
바다없는 설움?을 달래준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지역에선 청풍호를 일러 ‘내륙의 바다’라 한다.

일행들이 산중오찬을 위해 자리를 펼쳐놓은 안부쉼터로 내려섰다.
철계단 양옆 암벽에는 눈이 녹아 내려 고드름이 열렸다.
너무 크게 자라 제 무게를 못이겨 떨어지기도 하는데
산객들의 안전사고가 염려되는 대목이다.
왔던 길을 되돌아 신륵사삼거리다. 여기서부터는 왔던 길을 버리고
덕주사(4.1km)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완만한 능선길이다.
미련 남아 뒤돌아 보니 둘레 4km, 높이 150m의 잿빛의
거대 바윗덩어리가 더없이 장엄해 보인다.
저 영봉에 달이 걸리면 月岳(월악)의 존재감은 더욱 확연할 것이다.
송계삼거리(덕주사 3.4km, 동창교 2.8km)를 지나자, 너른 헬리포트가 나온다.
영봉은 그새 뒤로 훌쩍 밀려나 암봉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산객들은 너나없이 스마트폰을 꺼내 영봉을 담느라 부산하다.
한동안 산행 필수품으로 똑딱이로 불리던 디카가 대세였는데
어느새 풍속도가 바뀌었다. 똑똑해진 스마트폰이 똑딱이를 밀어냈다.
마애봉으로 불리는 960봉에서 마애불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직진하면 만수릿지길이 시작되지만 ‘탐방로 아님’ 팻말을 세워 놨다.
월악산 만수봉으로 이어지는 릿지길은 거칠고 험한 구간으로
알려져 있어 장비를 갖추지 않았다면 기웃거리지 말아야 한다.
960봉에서 마애불로 향하는 지능선 구간을 걷다보면 탄성이 절로 새나온다.
탁트인 풍광에 홀려 걸음이 더뎌지는 구간이다.
노송과 바위 그리고 마루금이 어우러져 어딜 봐도 그림이다.
노송의 빼어난 자태는 아름다움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다.
북풍한설에 휘고 뒤틀리면서도 늘 독야청청하다보니 옛 묵객들도
소나무 예찬에는 인색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능선에서 마애불 방향으로 내려꽂는 길 또한 녹록치 않다.
철사다리 계단이 아찔하게 벼랑에 걸쳐져 있다.
음습한 계곡을 얼마나 내려왔을까?
나뭇가지들 사이로 절집 지붕이 빠꼼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마애불 옆에 자리한 극락보전이다.
자력의 이끌리듯 2단 석축 위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 앞에 섰다.
마애불의 시선이 향한 곳은 문경 하늘재 아래 미륵사지의 미륵불이다.
미륵불의 시선은 이에 화답 하듯 북쪽을 향하고 있다.
이렇듯 마애불과 미륵불은 시공을 넘나들며 눈빛을 교환하고 있다.

신라가 망하자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는 그의 누이인 덕주공주와 함께
천 년의 수도 경주를 떠나 문경 하늘재에 이르러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그때 이들 남매의 꿈에 관음보살이 동시에 나타났다.
“마의태자는 하늘재 아래 미륵사지에 북향하게 미륵불을 세워라”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들어 남향 암벽을 찾아 마애불을 새겨라”

오더를 접수한 남매는 각자 석공을 수배하여 작업에 들어갔다.
마의태자는 석공에게 미륵불에 자신의 얼굴을 주문했고 덕주공주 역시
마애불 얼굴은 자신의 모습을 닮게 새겨줄 것을 주문했다.
패망한 신라의 왕자와 공주의 여유일까? 애틋한 그리움 때문일까?

마애불을 벗어나 석문을 지날 때도, 덕주사를 지나 덕주골 주차장에 이를때까지도,
왕자와 공주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맴맴 돌았다.

아무튼 세기를 넘어 마의태자와 덕주공주는 지금껏 망국의 한과
그리움을 달래느라 눈빛을 주고받으며 우리 앞에 우뚝 서 있다.
신륵사(2.8km)신륵사삼거리(0.8km)영봉(0.8km)신륵사삼거리(1.4km)마애봉(1.1km)마애불(2.6km)덕주골주차장

이동거리: 9.5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