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은 온기가 있어 좋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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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죽령을 넘어온 칼바람은 밤새 창틀을 사납게 흔들어 댔다.
유년시절, 바람소리가 무서웠다. 어떤 녀석은 귀신들의 휘파람 소리라 했다.
전기도 없는 벽촌의 겨울밤은 유난히 길었다.
지금의 저녁뉴스 시간대인 8, 9시는 이미 오밤중이었다.
볼거리나 변변한 즐길거리 조차 없던 때라 저녁 밥상만 물리면 이불속으로 파고 들었다.
선택의 여지없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나라의 어린이’였다.
아침마다 자는 아이를 깨워 등교시키느라 진을 빼는 요즘 엄마들로선 이해하기 힘들겠으나,
이른 새벽이면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도 잠에서 깨어났던 것 같다.
하지만 따뜻한 이불 속을 박차고 나올 용기는 없었다.
매서운 칼바람이 심하게 몰아치는 날이면 아버지께선 평소보다 일찍 기침하여
주섬주섬 솜바지와 털잠바를 챙겨 입으셨다.
이불을 걷어차고 윗목으로 굴러간 나를 안아다가 아랫목으로 옮겨와 턱끝까지 이불을 덮어 주셨다.
그리고선 조용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셨다. 방문이 여닫힐 때 문틈으로 밀려드는 한기로
이미 잠은 씻은 듯 달아났지만 늘 잠든 척 했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 밖으로 나가시면 이내 거짓말처럼, 밤새 삐걱 거리던 정지문의 빗장 소리도,
처마에 쌓아둔 빈 사과궤짝들의 덜컹거림도 씻은 듯 사라졌다.
느슨해진 빗장을 야무지게 조여 걸고, 빈 궤짝 더미엔 새끼줄을 이어 걸어 흔들림을 잡으셨던 것이다.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와 발자욱 소리만으로도 동선을 가늠했을 만큼 영특(?)했지만
벌떡 일어나 도와드리지 못했던 걸로 보아 싹수만큼은 참으로 노랳던 것 같다.
그렇게 어스름이 걷힐 무렵까지 아버지께선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셨다.
바깥마당에 쟁여놓은 땔감을 한 단 들어다가 부엌에 내려 놓으면 그제서야 어머닌
머리수건을 두르고서 부엌으로 드신다.
초저녁에 군불을 넉넉히 지펴놓아 아침까지 아랫목이 뜨끈한데도 다시 아궁이에 군불부터 지피셨다.
아버지께선 물을 길러 사랑방 가마솥을 가득 채우셨다.
식구들 씻을 물을 충분히 데워 놓기 위해서이다.
이렇듯 세상 모든 부모님들은 식구를 위해서라면 매일 반복되는 고단한 일상도 기꺼이 감내하셨다.
구들장에 배를 깔고 엎드려 뭉그적거리다가 ‘학교 늦겠다’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이겨
어렵게 몸을 일으켰다. 방안인데도 웃풍은 또 얼마나 센지 하얗게 입김이 날렸다.
유리창엔 성에가 두텁게 끼여 매서운 바깥 기온을 짐작케 했다.
내복바람으로 우물가로 종종걸음 쳤다. 밤새 불던 칼바람은 잦아들었지만 볼살은 에일 듯 따가웠다.
아버지께서 이미 커다란 바케스에 펄펄 끓는 물을 가득 준비해 두셨다.
세숫대야에 끓인물 한 바가지와 찬물 반 바가지를 섞어 씻기 딱 좋게 해 주셨지만
춥다는 핑계로 언제나 허겁지겁 고양이 세수하듯 했다.
그래서 팔꿈치나 발뒤꿈치는 늘 자라등짝 처럼 때가 딱지처럼 되어 있었으니…
터서 갈라진 두 손등을 뜨뜻한 대야물에 담그면 따가우면서도 묘한 쾌감이 전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막 세수를 하고서 방 문을 열라치면 손은 문고리에 쩍쩍 들러붙었다.
어머니께선 학교가 십리 밖이라 겨울방학 전후, 등하교를 위해 방한에 바짝 신경을 쓰셨던 것 같다.
내복 위에 505 털실로 짠 도꾸리와 고리땡바지를 입히고 옷깃에 털이 달린 돕바와
토끼털 귀마개 그리고 줄이 달린 벙어리장갑으로 무장시켰다.
이 정도 방한복장은 당시로선 또래들이 부러워할 수준(?)이었다.
그래도 길을 나서면 콧물이 흘러 돕바에 얼어붙고 양말은 두켤레나 껴신었어도
고무신 바닥창에서 전해지는 얼얼함은 견디기 어려웠다.
유년시절의 겨울은 뼛속까지 시릴 만큼 모질게도 추웠으나 세월이 흘러 지금 생각하니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마도 부모님 온기가 그리워서일게다.
오늘도 어김없이 매스컴에선 온통 춥다고 호들갑이다.
기상캐스터는 출근길 인파들 사이를 누비며 온세상이 꽁꽁 얼어붙은 양, 극성을 떨며
출근길 복장을 단단히 갖추라 엄포를 날린다.
라디오 아침뉴스를 전하는 앵커의 시그널멘트도 줄곧 수은주의 오르내림에 고정되어 있다.
겨울이면 당연히 수은주가 영하로 떨어진다. 또 가끔은 두자리 숫자로 수은주가 곤두박질 칠 수도 있다.
이 모두가 지극히 정상이다. 계절에 맞게 추워야 할 때 춥고 더워야 할 때 더워야 한다.
오히려 걱정이라면 지구온난화로 인한 이상기온 현상이다.
이로인해 뒤죽박죽 되어가는 사계가 오히려 우려스럽다.
어쩌면 춥다고 느끼는 건 날씨 때문이 아니라 뒤죽박죽 되어가는 나라꼴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의 유년 시절 추위는 요즘 추위에 비할 바 아니게 혹독했지만 훈훈한 가족적 온기가 있어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초고가의 기능성 방한제품으로 온 몸을 감쌌어도 춥다고 호들갑인 지금은,
그만큼 사회적 온기가 사라져 버린 탓은 아닐까?
그렇다고 마냥 움츠러들 순 없다. 이왕 닥친 추위라면, 이왕 닥친 곤경이라면,
정면으로 맞닥뜨려 내성을 키워나감이 옳지 않을까, 그해 겨울의 온기를 떠올리면서…
유년시절, 바람소리가 무서웠다. 어떤 녀석은 귀신들의 휘파람 소리라 했다.
전기도 없는 벽촌의 겨울밤은 유난히 길었다.
지금의 저녁뉴스 시간대인 8, 9시는 이미 오밤중이었다.
볼거리나 변변한 즐길거리 조차 없던 때라 저녁 밥상만 물리면 이불속으로 파고 들었다.
선택의 여지없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나라의 어린이’였다.
아침마다 자는 아이를 깨워 등교시키느라 진을 빼는 요즘 엄마들로선 이해하기 힘들겠으나,
이른 새벽이면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도 잠에서 깨어났던 것 같다.
하지만 따뜻한 이불 속을 박차고 나올 용기는 없었다.
매서운 칼바람이 심하게 몰아치는 날이면 아버지께선 평소보다 일찍 기침하여
주섬주섬 솜바지와 털잠바를 챙겨 입으셨다.
이불을 걷어차고 윗목으로 굴러간 나를 안아다가 아랫목으로 옮겨와 턱끝까지 이불을 덮어 주셨다.
그리고선 조용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셨다. 방문이 여닫힐 때 문틈으로 밀려드는 한기로
이미 잠은 씻은 듯 달아났지만 늘 잠든 척 했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 밖으로 나가시면 이내 거짓말처럼, 밤새 삐걱 거리던 정지문의 빗장 소리도,
처마에 쌓아둔 빈 사과궤짝들의 덜컹거림도 씻은 듯 사라졌다.
느슨해진 빗장을 야무지게 조여 걸고, 빈 궤짝 더미엔 새끼줄을 이어 걸어 흔들림을 잡으셨던 것이다.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와 발자욱 소리만으로도 동선을 가늠했을 만큼 영특(?)했지만
벌떡 일어나 도와드리지 못했던 걸로 보아 싹수만큼은 참으로 노랳던 것 같다.
그렇게 어스름이 걷힐 무렵까지 아버지께선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셨다.
바깥마당에 쟁여놓은 땔감을 한 단 들어다가 부엌에 내려 놓으면 그제서야 어머닌
머리수건을 두르고서 부엌으로 드신다.
초저녁에 군불을 넉넉히 지펴놓아 아침까지 아랫목이 뜨끈한데도 다시 아궁이에 군불부터 지피셨다.
아버지께선 물을 길러 사랑방 가마솥을 가득 채우셨다.
식구들 씻을 물을 충분히 데워 놓기 위해서이다.
이렇듯 세상 모든 부모님들은 식구를 위해서라면 매일 반복되는 고단한 일상도 기꺼이 감내하셨다.
구들장에 배를 깔고 엎드려 뭉그적거리다가 ‘학교 늦겠다’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이겨
어렵게 몸을 일으켰다. 방안인데도 웃풍은 또 얼마나 센지 하얗게 입김이 날렸다.
유리창엔 성에가 두텁게 끼여 매서운 바깥 기온을 짐작케 했다.
내복바람으로 우물가로 종종걸음 쳤다. 밤새 불던 칼바람은 잦아들었지만 볼살은 에일 듯 따가웠다.
아버지께서 이미 커다란 바케스에 펄펄 끓는 물을 가득 준비해 두셨다.
세숫대야에 끓인물 한 바가지와 찬물 반 바가지를 섞어 씻기 딱 좋게 해 주셨지만
춥다는 핑계로 언제나 허겁지겁 고양이 세수하듯 했다.
그래서 팔꿈치나 발뒤꿈치는 늘 자라등짝 처럼 때가 딱지처럼 되어 있었으니…
터서 갈라진 두 손등을 뜨뜻한 대야물에 담그면 따가우면서도 묘한 쾌감이 전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막 세수를 하고서 방 문을 열라치면 손은 문고리에 쩍쩍 들러붙었다.
어머니께선 학교가 십리 밖이라 겨울방학 전후, 등하교를 위해 방한에 바짝 신경을 쓰셨던 것 같다.
내복 위에 505 털실로 짠 도꾸리와 고리땡바지를 입히고 옷깃에 털이 달린 돕바와
토끼털 귀마개 그리고 줄이 달린 벙어리장갑으로 무장시켰다.
이 정도 방한복장은 당시로선 또래들이 부러워할 수준(?)이었다.
그래도 길을 나서면 콧물이 흘러 돕바에 얼어붙고 양말은 두켤레나 껴신었어도
고무신 바닥창에서 전해지는 얼얼함은 견디기 어려웠다.
유년시절의 겨울은 뼛속까지 시릴 만큼 모질게도 추웠으나 세월이 흘러 지금 생각하니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마도 부모님 온기가 그리워서일게다.
오늘도 어김없이 매스컴에선 온통 춥다고 호들갑이다.
기상캐스터는 출근길 인파들 사이를 누비며 온세상이 꽁꽁 얼어붙은 양, 극성을 떨며
출근길 복장을 단단히 갖추라 엄포를 날린다.
라디오 아침뉴스를 전하는 앵커의 시그널멘트도 줄곧 수은주의 오르내림에 고정되어 있다.
겨울이면 당연히 수은주가 영하로 떨어진다. 또 가끔은 두자리 숫자로 수은주가 곤두박질 칠 수도 있다.
이 모두가 지극히 정상이다. 계절에 맞게 추워야 할 때 춥고 더워야 할 때 더워야 한다.
오히려 걱정이라면 지구온난화로 인한 이상기온 현상이다.
이로인해 뒤죽박죽 되어가는 사계가 오히려 우려스럽다.
어쩌면 춥다고 느끼는 건 날씨 때문이 아니라 뒤죽박죽 되어가는 나라꼴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의 유년 시절 추위는 요즘 추위에 비할 바 아니게 혹독했지만 훈훈한 가족적 온기가 있어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초고가의 기능성 방한제품으로 온 몸을 감쌌어도 춥다고 호들갑인 지금은,
그만큼 사회적 온기가 사라져 버린 탓은 아닐까?
그렇다고 마냥 움츠러들 순 없다. 이왕 닥친 추위라면, 이왕 닥친 곤경이라면,
정면으로 맞닥뜨려 내성을 키워나감이 옳지 않을까, 그해 겨울의 온기를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