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봉우리가 연이어 있는 홍천 팔봉산을 찾았다.
봉우리 숫자가 곧 산이름인 곳이다.
걸음했던 산들 중엔 충북 제천 삼봉산(910m), 경기 양주 칠봉산(506m),
그리고 진안 구봉산(1002m)의 이름이 그러하다.

홍천 팔봉산은 327m로 야트막하다.
그렇다고 만만하게 봤다간 큰 코 다친다.
아기자기하면서도 험산인 팔봉산, 괜히 100대 명산이 아니다.
높이는 낮지만 옹골찬, 코스는 짧지만 다이나믹한 그런 산이다.
홍천 9경 중 제 1경으로 이름값 톡톡히 한다.

얼마 전 해거름에, 홍탁을 놓고 知友 K와 마주했다.
옛이야기 주고받다가 지난 연말, 홍천으로 낙향한 P선배를 떠올렸다.
자연스레 P선배도 만나볼 겸 얼렁뚱땅 홍천 팔봉산행을 약속했다.
P선배는 30년 간 수도권 중고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다가 돌연 명퇴를 하더니
팔봉산 인근 숲 좋은 곳에 ‘오크포레스트팬션’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산행 후 팬션에서 1박하고 다음날 귀경하는 걸로
知友 K와 입을 맞추고 이를 P선배에게 알렸다.
“대환영이다. 방 하나 비워 두겠다”며 반색했다.

팔봉산 들머리 매표소 앞에 이른 시각은 11:00.
조금은 민망스런 돌 형상에 시선이 꽂힌다.
나무 장승 역시 거시기한 모습이다.
무슨 연유로 팔봉산 들머리에 이런 男根石과 木을?

팔봉산은 암릉이 까칠하여 곳곳에 추락 위험요소가 많다.
20여년 전부터 실족 사고로 생명을 잃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어느날 이 산 밑을 지나던 노인이 이렇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는데…
“음기가 센 산이라 이를 다스릴 비책을 써야 해!”
이를 귀담아 들은 팔봉산상인회와 관광지관리사무소는
산 들머리에 남근 형상을 세워 음기를 눌렀고
신통하게도 이후부터 사고가 잦아들었다는데…글쎄~
입구를 지나 철다리를 건너면 바로 산자락에 붙는다.
다리 난간에 빼곡히 내걸린 산악회 리본이 노란색 일색이다.
세월호 추모와 궤를 같이하는 느낌이다.
초입서부터 불규칙하게 놓인 침목 계단을 가파르게 디뎌 오른다.
처음 만나 이정표는 1봉과 2봉 가는 길을 가리킨다.
몇몇 산객은 1봉의 가파른 바위벼랑을 포기하고 곧장 2봉으로 향하기도 했다.
순서대로 봉우리를 맞는 쏠쏠한 재미를 놓칠 순 없다.
바위 돌출부를 움켜잡고서 몸을 끌어올린다.
볕에 바짝 달궈진 바위가 뜨겁다.
장갑은 필수다.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그렇게 첫 봉에 올라섰다.
팔봉산을 감싸 흐르는 홍천강 너머 마을이 그지없이 평화롭다.
1봉에서 내려서는 길 역시 밧줄은 기본, 직벽에 박힌 손바닥 크기의
발판을 조심스레 내려디뎌야 한다.
집중과 주의를 요하는 곳이 많아 곳곳이 정체다.
2봉(327m)이다.
높이로만 따진다면 2봉이 팔봉산의 주봉이다.
2봉에는 당집(삼부인당)이 올라앉아 있다.
金, 李, 洪씨, 세 부인을 모시고 있는 당집이다.
………
옛날옛적, 팔봉산 아래 마을에 시어머니 이씨, 딸 김씨, 며느리 홍씨가
함께 사는 집이 있었다. 셋 모두 과부의 몸이었다.

가세가 기울어 어렵사리 끼니를 이어가며 살아가던 중
지지리 남편 복도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며 죽기를 작심하고
팔봉산 2봉에 올라 서로 부둥켜 안은 채, 먼저 간 무심한 남편들을 향해
목놓아 울다가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3일 만에 깨어난 이들 삼부인은 그 봉우리에서 신내림을 받았다.
마을 사람들은 삼부인이 신내림 받은 2봉에 사당을 짓고 이들로 하여금
해마다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굿을 올리게 했다.
그랬더니, 해마다 사방 백리 내의 농사는 대풍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해부터인가 풍년이 계속되어 살만해지자,
마을 사람들은 삼부인이 올리는 당굿을 하찮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삼부인은 홀연히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해 농사는 흉년이 들었고, 아사자가 넘쳐났다.

당황한 마을 사람들은 무당을 불러 삼부인을 위로하는 당굿을 다시 올렸다.
그때부터 삼부인을 신으로 모셨고 그 사당을 삼부인당이라 이름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다시 풍년이 들었다.
이후 매년 삼부인 신을 위로하는 당제를 거르지않고 올렸으며
지금도 3월과 9월 보름에 당제를 지내고 있다.
…………
2봉에 서서 바라본 3봉 바위는 들머리에서 만난 남근석을 빼닮았다.
2봉에서, 먼저 간 무심한 남편들을 떠올리며 목놓아 울었을
삼부인의 시린 마음이 이해가 될듯도 하고…
바위벼랑을 버벅대며 내려서자, 다시 가파른 철계단이 바통을 잇는다.
2봉과 3봉사이 안부에 하산로(1차 탈출로)가 있다.
홍천강가에 물놀이 왔다가 산이 야트막해 산보하는 기분으로
올라온 이들이 ‘어이쿠’하며 내려가는 코스이기도 하다.
3봉에 올라 산기슭을 굽이도는 홍천강을 굽어본다.
한줌 강바람이 목덜미를 훑고 지난다.
가슴 열어 바람을 안았다. 한줄기 오아시스와도 같다.
지나온 2봉도 팔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깝다.
이처럼 팔봉산의 여덟봉우리는 서로 어깨동무 한듯 하다.
3봉을 내려서면 길은 ‘해산굴 가는 길’과 ‘4봉 가는 길’로 갈라진다.
어디로 가든 4봉에서 만나나 ‘해산굴’ 코스를 택하면 말 그대로
해산의 고통?을 제대로 맛보게 된다.
바위 구멍 통과하기가 아이 낳는 고통 만큼이나 힘들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주변 도움 없이 혼자서 빠져나오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 ‘해산굴’은 팔봉산의 명물로 통한다.
우회길을 택했다. 협곡을 가로지른 철다리를 건너고 철계단을 기어 올라
옥문?에 이르니 때마침 한 사람이 해산의 고통을 몸소 체험 중이었다.
이리저리 몸뚱어리를 뒤틀어 보다가 포기하고 만다.
날씬한 사람만이 순산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코스이다.
굽어보이는 홍천강은 더없이 유려하나 팔봉산의 속살은 거칠고 투박하다.
구간은 짧지만 암릉의 스릴을 만끽할 수 있는 요건은 두루 갖추고 있다.
5, 6, 7, 8봉 가는 길의 오르내림은 더욱 까칠했다.
지친 산객들이 5봉과 6봉 사이 탈출로로 무리지어 하산한 탓에
남은 구간의 등로가 조금은 널널해진 느낌이다.
네 발을 다 써가며 5, 6봉 지나 7봉에 이르니 저만치서 8봉이 어서오라 손짓한다.
7봉을 내려서니 엄포성 ‘안내경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8봉은 팔봉산 등로 중 가장 험한 구간이라 안전사고가 잦다며
체력에 자신이 없거나 노약자는 마지막 탈출로로 하산하라는 내용이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까지 와서 옆길로 새는 사람은 없다.
한때 산을 심하게 오르내려 도가니가 부실해졌다며 암릉 걷기를 주저하던
K가 모처럼 암릉 타기에 푹 빠진 듯. 재미가 쏠쏠한가 보다.
날다람쥐처럼 가뿐한 몸놀림으로 줄곧 앞서 걷는다.
천신만고 끝에 8봉에 올라섰다.
지나온 일곱 봉우리가 7봉 뒤로 중첩되어 펼쳐지고
발아래 홍천강은 유유히 흘러 산기슭을 휘감는다.
걷는 내내 푸른 강을 굽어볼 수 있어 좋았다.
거친 오르내림에 지루할 틈이 없어 좋았다.
설악 공룡능선의 축소판 처럼 아기자기해 좋았다.
바위 틈을 비집고 뿌리내린 노송의 질긴 생명력이 좋았다.
이제부터 길은 홍천강으로 내리꽂듯 나 있다.
스텝이 꼬이지 않게 발디딤용 철판을 디뎌야 한다.
파이프 난간을 잡은 양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간다.
평행봉을 하면서 하산하는 기분이다. 긴장감 백배다.
산을 다 내려서면 매표소까지 강을 따라 길이 이어져 있다.

K가 말했다.

“산행시간이 짧아 걸은 것 같지 않지? 내친김에
P선배가 운영하는 펜션까지 쭈욱 걷는 게 어때?”
그렇게하여 픽업하겠다는 P선배를 주저앉히고선 작열하는 태양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길을 따라 10여 킬로미터 남짓 걸어
기진맥진, 파김치가 되어 1박이 예정된 펜션에 닿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