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약속시간에 왜 늦어? 아들과의 말없는 정전(停戰)은 오늘 파기되었다. 글쎄요. 왜 늦을까요? 정신문제 아닐까. 알람은 뭐 하러 맞춰놓니? 저도 아는 데요 그게 잘 안 돼요. 사실 이 문제는 아들이 친구들과의 약속에 자주 늦는다는 이유만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참고 또 참았던 인내심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친구들에게 자극을 받았을까? 노는 게 직업이던 아들이 공부를 시작했다. 반 학기 만에 심화 반에 들어갔다. 얼마나 고맙던지. 나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래! 그래야 오미경 아들이지! 그런 아들이 1년 남짓 하던 기숙사 생활을 청산하고 나와 버렸다.그것도 2학년 2학기 그 중요한 시기에.

자유를 억압해서 싫단다. 고등학교공부는 체질에 맞지 않아 못하지만 대학교 가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겠다며 아예 대놓고 논다. 엄마 걱정 마세요. 저를 믿으세요! 걱정스런 눈빛이라도 보일라치면 말도 못하게 선수를 친다. 아들 믿지. 야심찬 결심을 하고 도전한 전쟁은 또 그렇게 무참한 패배로 막을 내렸다. 아들 앞에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뒤돌아 나가는 등을 향해 한 소리 하고 싶지만 꿀꺽 삼킨다. 이런 아들이 뭐 좋다고 우리 엄마는 그렇게 아들 타령을 했을까! 나는 왜 아들을 원했을까! 지금도 그런 아들이 그립다. 잘 다녀 와! 전쟁을 치른 다음날에 어김없이 더욱 상냥한 어투로 아들의 무사 귀환을 빈다. 이런 심리를 두고 프로이트는 ‘남근선망(Penis Envy)’이라고 명명했다. 아! 밉다. 프로이트. 그냥 프로이트에게 책임을 묻고 싶다.

오늘 대학교 1학년 남학생이 상담을 신청해 왔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보였다. 예뻤다! 뉘 집 귀한 자식인지 알 수 없지만 그저 예뻤다. 잘 치료해줘야지. 진심어리지만 약간은 가증스런 미소가 그를 만족 시킨 듯하다. 상담가가 이렇게 사심이 있으면 안 되는데 말이다. 기대라는 것은 언제나 실망과 함께 다닌다. 나는 아들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기대하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쓴다. 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다. 나를 믿듯이 아들을 믿는다. 잘 할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은 거다. 그렇게 속고 또 속아도 또 속는다.

하루는 학교에서 들어온 아들이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방에서 소리를 질렀다. 엄마! 있잖아요.

뭐가? 제가요 여태껏 왜 몰랐는지. 뭘? 엄마가 얼마나 멋진 분이신지를 저만 몰랐더라구요. 어머! 그랬니? 고마워 아들. 눈물을 글썽이는 흉내를 내며 아들을 너무나 사랑스러운 척 바라보았다. 튀어 나오려는 말을 억 누르며 표정관리 하느라 무척 힘들었다. 아들과 힘겨루기 해 봐야 어차피 지는 싸움에 나 자신의 본성을 들키지 않으려고 다시 이를 악물었다. 멋지다. 아들이 최고다. 아들 믿는다. 하는 말 외에는 가능하면 하지 않는다. 아들도 다 아는 일을 또 자극한다는 것은 불을 지고 있는 아들에게 기름을 붓는 격이다. 아들을 키우면서 인내심도 함께 키운다. 자식은 믿는 만큼 자란다는 말이 있다. 오늘도 아들을 위해 웃음을 준비해 두었다. 격전(激戰)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개선장군(凱旋將軍) 보듯이 그렇게 볼 것이다. 그저 엄마이고 또 아들인 이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