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은 내 삶의 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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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은 내 삶의 동력이다
사진 : http://community.sellfree.co.kr/bbs/board.php?bo_table=talk_4_2&wr_id=1081
“인간을 이용하려는 불행보다 더 끔찍한 것이 있는 데, 그 것은 바로 이용당할 기회마저 상실하였다는 사실이다. …… 그들이 필요없다는 것은 그들 외의 사람들에게 필요없다는 뜻이 아니다. 시장경제에 필요없다는 뜻이다. 그들은 이제 이 경제에 이익을 가져다 줄 가능성의 근원이 되지 못한다.” (비비안느 포레스테의 경제적 공포에서)
내가 이 책을 대학에 다닐 때 보았다면 정말 실감을 했을 것이다. 대학 4학년때는 ‘정말 내가 취직을 할수있을까?’라는 막막한 두려움에 지냈다. <고용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들> 사이에 어떻게나마 끼어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취직이 되었고, 시간이 지나서 사업을 하면서 난 더 큰 두려움에 휩싸여있다.
아침에 일어나니 할 일이 없다. 어디를 가고자 해도 갈 곳도 없다. 그냥 집에서 나온다. 무작정 책방을 돌아다니다 점심때가 되니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다. 그 때 누군가로부터 직장 자리가 있으니 취직하지 않겠냐고 제안이 온다. 반갑다고 해서 이력서를 정성껏 써서 보내지만 아무런 회신이 없다. 기대를 했는 데 ……. . 살면서 정말로 내일 아침에는 해가 뜨지 않았으면 할 때가 4번은 있었다. 그 중 2번은 부모님의 슬하에 있었으니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사업을 하면서 한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그런 두려움을 겪게 될 때는 정말 겁이 나고, 머리가 빠지면서 흰머리가 나고 새벽잠이 없어졌다. 살면서 생에 대한 두려움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커져만 가고 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언제나 남보다 뒤져서 가고 있고, 미처 따라가지 못할 까봐 겁을 내고, 현재 있는 것마저 잃을까봐 겁을 내면서 살아왔다.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
<노후를 준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
난 과연 그런 능력을 지닌 자가 될 수있을까?
“고전 경제학에서는 전반적인 과잉생산을 인정하지 않았다. 단지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과잉생산만을 인정했을 뿐이다. 18세기 말에 이미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며 시장에 대한 간여가 없다면 수요와 공급은 균형을 이룬다는 프랑스의 경제학자 세이의 주장이 정론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 맬서스는 자유무역의 범람이 공급과잉을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일찌감치 세이이론의 허구성을 비판했으며, 이후 마르크스와 케인즈에 의해 세이의 이론은 뿌리째 흔들렸다. 마르크스는 기업들이 벌이는 자본주의의 무계획성, 즉 자본주의의 기업들이 총 생산이나 총 수요의 조정없이 벌이는 지나친 경쟁으로 생산은 수요를 초과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으며, 유효수요의 부족에서 과잉생산의 원인을 찾은 케인스는 과잉생산이 지속적일 수있다고 보았다.” (이재광의 ‘과잉생상,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에서)
이러한 과잉생산은 기업을 무한경쟁으로 몰아갔고, 정부 또한 이 환경에서 벗어날 수없다. 문제는 최근 40여년간 지속된 과잉생산은 너무 지나치게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저자는 두 가지를 꼽는다. 1) 전쟁이 없었다. 자본주의 선진국 간의 전쟁은 자본주의 내 공급 과잉문제를 해소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기존의 생산 시설을 파괴했으며, 전쟁특수라는 대대적인 특별수요를 창출해냈다. 2) 대불황의 부재이다. 전적으로 경제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자본주의 역사에서 대불황은 사실상 과잉생산을 제거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리고 그 과잉생산의 말미에 이르르자 세상은 더 불안해지고 있다.
요즘 자주 나오는 말, ‘경제공황!’, ‘앞으로는 더 힘들어질 것이다’, ‘달러의 붕괴’, ……
이런 말이 나올 때마다 ‘하필 내가 살아있을 때 이런 어려운 말들이 나오는 지 속상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설령 그런 일들이 벌어지더라도 내가 살아있을 때 터지지는 말아야 하는 데 하는 기대를 해본다. 2012년을 맞이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2011년보다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이 난무하다. 크리스 마틴슨이 쓴 ‘크래시코스’를 보면 더 불안해진다. 다른 책들은 지금의 경제전망을 주로 금융의 위기에서 찾고, 그 위기가 실물에까지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줄거리이다. 이 책은 그 줄거리가 거꾸로 간다. 지구의 차원, 특히 에너지 자원이 고갈되어가니 위기가 올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던지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은 이 것이다. 저축은 점점 감소하고 부채 수준은 이미 최고 기록을 경신한 마당에 이런 곤경을 헤쳐 나가는 데 필요한 자금은 어디서 나오는가? 이 한가지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돼있다.
* 연금과 복지정책 자금 부족분이 수십조 달러 (수백조 달러까지는 아니더라도)에 이르는 데 이를 어디서 조달하는 가?
* 피크오일(석유를 채굴할 수 있는 최대량)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교통 인프라를 재편하는 데 필요한 자금은 얼마인가?
* 부동산 거품과 신용 거품의 붕괴 여파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자금은 어디서 마련하는가?
* 인구는 더 늘어나고 따라서 점점 줄어드는 자원에 대한 수요는 더 증가한다고 할 때 미래의 식품가격은 얼마나 더 비싸질까?
* 높은 부채 수준과 낮은 저축 수준이 경제의 숨통을 조이는 와중에 이처럼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과제들을 과연 어떻게 해결할 수있을까?“
글쎄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무한한 발전을 믿으며 급속히 발전하는 기술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대한 기대를 저자는 또 깨버린다. “기술이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기적을 안겨준 것처럼 보이는 까닭에 기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가 종종 있다. ……. 결정적으로 기술은 에너지를 창조할 수없다. 에너지는 창조될 수도 파괴될 수도 없다. 이 것이 열역학 제1법칙이다. 에너지는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환될 뿐이다. …… 에너지는 다양한 형태로 변환되지만 궁극적인 에너지 총량은 항상 같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석유나 석탄, 물과 같은 자원을 너무 많이 소비하는 바람에 이를 회복할 길이 매우 없다는 것이다. 현재의 금융위기도 자원이 넉넉하다면 해결할 수있겠지만, 결국 지구자원 총량에서 써버릴 수 있는 모든 부(富)를 소진했기 때문에 돈을 아무리 찍어내도 소용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마틴슨은 다가 올 미래에 대비하여 어떻게 하라는 걸까? “한마디로 최소한 물이라도 넉넉한 곳에서 자급자족할만정도의 농사를 지으면서 조용히 최소의 자원을 사용하면서 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라는 것이다.”
점점 세상은 불안해져가고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살아생전에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아야 하는 것이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하루라도 빨리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살아날 궁리를 만들어내야 겠다는 게는 소시민으로서의 내 생각이다. 내가 보기에 전쟁은 아니더라도 대불황은 필연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정부에서 과잉생산을 해소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역할이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돈을 풀어서 문제를 해결하는 재정정책은 더 심각한 과잉생산을 불러일으키거나 효과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현재의 불황이 대불황을 조금은 완화시켜주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 같다. 어쨌든 정부에서는 나름대로 노력하겠지. 그럼 난 무엇을 해야할 까?
문제의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할수록 점점 더 확실해지는 것은 ‘홍재화’라는 개인은 사회적 상황에 영향을 주거나, 해결책을 제시하는 존재가 아니라, 불행히도 남에 대한 영향력은 전혀 없으면서, 남이 주는 영향은 그대로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세상을 보는 관점도 100만대군을 호령하는 제갈공명의 입장이 아니라, 본의아니게 100만대군의 맨 앞에서서 누구보다도 조조 군의 칼을 먼저 맞고 쓰러질까봐 떨면서도 뒤돌아 서지 못하는 이름없는 졸개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 있다.
그 두려움은 세상을 살기 시작한 지 50여년, 내 장사를 시작한 지 17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나에게 채찍질을 등뒤에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