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던 내 마음 속의 의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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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에서 열차로 10시간 이상이 걸리는 Luxor. 아침 일찍 기차를 타도 나일강에 석양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즈음에 도착하게 된다. 열차 안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일강에 서서히 내려 앉는 해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집트 여행은 추억으로 간직되고 찬란한 고대 문명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룩소르에 도착하자마자 부지불식간에 느끼게 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던 파라오들의 숨결은 비단 나만 느끼는 것은 아닐 것 같다.
멤논의 거상, 왕가의 계곡, 카르낙 신전, 룩소르 신전, 핫셉슈트 신전 등을 보다 보면 이미 이집트학의 대가가 된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게 되고, 어렸을 때 소년잡지에서 읽었던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가 발견된 파라오의 묘를 보게 되면 전율이 느껴질 정도다. 적어도 왜 많은 사람들이 약 500년간 이집트의 수도였던 룩소르를 보지 않고 이집트를 논할 수 없으며 룩소르가 이집트의 정신적 버팀목이며 핵심이라고 말하는 지를 금방 알게 된다
그런데 이런 전율과 감동을 한 순간에 가시게 하는 것이 이집트인들의‘바쿠시시’다. 이집트의 어디를 가도 바쿠시시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특히 외국인들에게 바쿠시시라는 말은 짜증과 불쾌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마음 속에 일었던 이집트의 신비감은 바쿠시시라는 그들의 외침과 더불어 저 멀리 사라지게 된다.
바쿠시시는 어떤 서비스를 받았을 때 지불하는 일종의 팁과 같은 것이다. 서비스의 종류를 불문하고 어떤 도움을 받았을 때, 도움을 준 사람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지불하는 수고비 같은 개념이다. 물론 강제성을 띤 것이 아닌 자발적으로 주는 것이다.
물론, 바쿠시시는 이슬람 교리에 따르면 많이 가진 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어 주는 도움이라는 뜻이다. 강요된 것이 아닌 측은한 마음에서 나오는 아주 자연스럽고 숭고한 행위인 것이다. 아랍 친구에게 라마단 기간 중에 이슬람 신자들이 금식을 하는 것도 헐벗고 굶주린 자들의 고통을 간접적으로나마 나누기 위한 것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바쿠시시도 같은 맥락이 아닐 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다가와 신발을 닦거나, 원하지도 않은 길안내를 하고 나서, 사진을 찍어 주고 나서, 그들이 태연히 외치는 바쿠시시를 어디서나 자주 듣게 되면 위대한 조상들이 이룩해 놓은 문화유적을 팔아 먹고 사는 게으른 거지근성이라는 이미지만 남게 된다. 보통 1파운드(이집트 1파운드는 약 200원 정도임) 정도의 바쿠시시를 주는 경우가 많은데, 돈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그들의 터무니 없는 요구에 기분을 망치는 외국인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집트인들에게 외국인들은 그저 아낌없이 돈을 내어 주는 대상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저녁 일곱 시가 다 되어 룩소르 역에 도착한 나는 숙소를 찾아야 했다. 많은 호객꾼들이 숙소를 찾는 나에게 다가와 흥정을 시작했다. 아랍어 억양이 많이 섞인 그들의 어색한 영어가 내가 고대 이집트가 아닌 이슬람화가 된 이집트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 준다. 잠시나마 열차 안에서 머리 속으로 그려본 룩소르의 이미지는 고대의 그것이었다. 그런데 역에서 나오자마자 난 그런 머리 속 환상을 깨고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카이로와 기자의 피라미드 앞에서 유쾌하지 않은 바쿠시시에 대한 에피소드를 워낙 많이 겪고 내려와서 인지 흥정을 위해 달려드는 현지인들이 결코 반갑지 않았다. 난 배도 고프고 해서 그들의 호객을 무시하고 눈에 들어오는 레스토랑으로 황급히 발을 옮겼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니 더 이상 그들이 쫓아 들어오지 못했다.
이집트의 대표적 대중음식인 Kosari 를 시켜서 먹고 있는데, 바로 옆 테이블에 홀로 앉아 식사를 하고 있던 15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나에게 말을 걸어 왔다.
“ 일본에서 왔나요. 아니면 한국 ? ”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이런 식의 질문에 어느 정도 적응된 나도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 난 한국에서 왔고 내 이름은 Brian 이란다.”
“ 내 이름은 Hassan 이고 룩소르 근처에서 살고 있어요.”
그 소년도 작은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하싼이라는 소년의 어투나 행동거지가 불량해 보이지도 않았고, 숙소를 찾아야 하는 나로서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여서 나도 룩소르에 대한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 소년도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한국에 대한 여러 질문을 해왔다. 물론 마음 속 한 편에서는 바쿠시시에 대한 작은 걱정이 싹트고 있었지만, 숙소를 찾기 위해서는 기꺼이 약간의 바쿠시시를 내어 줄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하싼과 난 계속 이야기를 이어 갔다.
– 계속 –
멤논의 거상, 왕가의 계곡, 카르낙 신전, 룩소르 신전, 핫셉슈트 신전 등을 보다 보면 이미 이집트학의 대가가 된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게 되고, 어렸을 때 소년잡지에서 읽었던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가 발견된 파라오의 묘를 보게 되면 전율이 느껴질 정도다. 적어도 왜 많은 사람들이 약 500년간 이집트의 수도였던 룩소르를 보지 않고 이집트를 논할 수 없으며 룩소르가 이집트의 정신적 버팀목이며 핵심이라고 말하는 지를 금방 알게 된다
그런데 이런 전율과 감동을 한 순간에 가시게 하는 것이 이집트인들의‘바쿠시시’다. 이집트의 어디를 가도 바쿠시시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특히 외국인들에게 바쿠시시라는 말은 짜증과 불쾌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마음 속에 일었던 이집트의 신비감은 바쿠시시라는 그들의 외침과 더불어 저 멀리 사라지게 된다.
바쿠시시는 어떤 서비스를 받았을 때 지불하는 일종의 팁과 같은 것이다. 서비스의 종류를 불문하고 어떤 도움을 받았을 때, 도움을 준 사람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지불하는 수고비 같은 개념이다. 물론 강제성을 띤 것이 아닌 자발적으로 주는 것이다.
물론, 바쿠시시는 이슬람 교리에 따르면 많이 가진 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어 주는 도움이라는 뜻이다. 강요된 것이 아닌 측은한 마음에서 나오는 아주 자연스럽고 숭고한 행위인 것이다. 아랍 친구에게 라마단 기간 중에 이슬람 신자들이 금식을 하는 것도 헐벗고 굶주린 자들의 고통을 간접적으로나마 나누기 위한 것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바쿠시시도 같은 맥락이 아닐 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다가와 신발을 닦거나, 원하지도 않은 길안내를 하고 나서, 사진을 찍어 주고 나서, 그들이 태연히 외치는 바쿠시시를 어디서나 자주 듣게 되면 위대한 조상들이 이룩해 놓은 문화유적을 팔아 먹고 사는 게으른 거지근성이라는 이미지만 남게 된다. 보통 1파운드(이집트 1파운드는 약 200원 정도임) 정도의 바쿠시시를 주는 경우가 많은데, 돈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그들의 터무니 없는 요구에 기분을 망치는 외국인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집트인들에게 외국인들은 그저 아낌없이 돈을 내어 주는 대상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저녁 일곱 시가 다 되어 룩소르 역에 도착한 나는 숙소를 찾아야 했다. 많은 호객꾼들이 숙소를 찾는 나에게 다가와 흥정을 시작했다. 아랍어 억양이 많이 섞인 그들의 어색한 영어가 내가 고대 이집트가 아닌 이슬람화가 된 이집트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 준다. 잠시나마 열차 안에서 머리 속으로 그려본 룩소르의 이미지는 고대의 그것이었다. 그런데 역에서 나오자마자 난 그런 머리 속 환상을 깨고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카이로와 기자의 피라미드 앞에서 유쾌하지 않은 바쿠시시에 대한 에피소드를 워낙 많이 겪고 내려와서 인지 흥정을 위해 달려드는 현지인들이 결코 반갑지 않았다. 난 배도 고프고 해서 그들의 호객을 무시하고 눈에 들어오는 레스토랑으로 황급히 발을 옮겼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니 더 이상 그들이 쫓아 들어오지 못했다.
이집트의 대표적 대중음식인 Kosari 를 시켜서 먹고 있는데, 바로 옆 테이블에 홀로 앉아 식사를 하고 있던 15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나에게 말을 걸어 왔다.
“ 일본에서 왔나요. 아니면 한국 ? ”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이런 식의 질문에 어느 정도 적응된 나도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 난 한국에서 왔고 내 이름은 Brian 이란다.”
“ 내 이름은 Hassan 이고 룩소르 근처에서 살고 있어요.”
그 소년도 작은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하싼이라는 소년의 어투나 행동거지가 불량해 보이지도 않았고, 숙소를 찾아야 하는 나로서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여서 나도 룩소르에 대한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 소년도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한국에 대한 여러 질문을 해왔다. 물론 마음 속 한 편에서는 바쿠시시에 대한 작은 걱정이 싹트고 있었지만, 숙소를 찾기 위해서는 기꺼이 약간의 바쿠시시를 내어 줄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하싼과 난 계속 이야기를 이어 갔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