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HR협회] 나이 든다는 것과 변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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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는 삼 일만 있다는 말이 있다. 과거형 어제, 현재형 오늘, 미래형 내일이다. 삼 일 중 오늘이 반복되면서 세상을 바꾸고 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제와 다른 오늘의 내 모습이다. 나이 듦은 단풍과 같다. 겨우내 추위를 이겨내고 파릇파릇하게 돋아난 잎새는 따스한 봄 햇살의 보살핌과 여름장마의 역경을 이겨 내면 가을이 되어서 자신만의 색깔을 뽐내는 단풍으로 거듭 태어나게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풍부한 경험과 경륜에 의해 물든 당당한 자신만의 색깔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수이신 김형석교수는 65세 이후가 인생의 황금기라 한다. 나이가 들어야 자신만의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뜻 아닐까?
어릴 때 선반 위에 먹을 것을 찾으려고 까치발로 안간힘을 썼던 추억이 있다. 여의치 않으면 발 딛고 올라 설 수 있는 것을 찾았다. 이처럼 클 때에는 도구나 수단이 필요하였다. 나이가 들면서 성장기와 달리 어지간한 것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 살아 온 세월만큼 다양한 경험이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해 준다. 경험은 자신만이 살아 온 방법이자 상징이다. 경험이 고착화되면 고집 센 ‘외곬’이 된다. 고집은 ‘꼰대’로 접어드는 첩경이요, 변화의 길목에 걸림돌이 된다. ‘예전에 내가 해 봐서 아는데…..’를 버려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변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변화는 진화이다. 진화는 생존하기 위함이다. 오죽하면 모 그룹 회장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라고 외쳤을까. 진화론의 다윈은 ‘강한 것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강하다’라고 역설하였다. 4차 산업혁명시대의 변화 속도는 사칙연산의 산술급수적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이다. 어제의 진실이 오늘은 아닐 수도 있다. 지식도 유통기한이 있다. 한 번 배운 것으로 평생 먹고 사는 시대는 역사의 기록물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꼰대’가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 세상의 바뀜을 쉼 없이 배워야 한다. 배워야 변하고, 변해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게 되면 조직에서 물러난다. 약간의 불안과 두려움은 있지만, 누구나 겪게 되는 ‘은퇴’이다. 은퇴의 사전적 정의는 맡은 바 직책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서 한가로이 지내는 것이다. 필자는 기존의 정의와 달리 100세 시대의 은퇴(隱退)는 ‘자신의 물러남(退)을 알리지 말라(隱)’라고 해석한다.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이 살아 온 날만큼 남아 있기 때문이다. 피터 드러커는 ‘40년을 산 사람이라면 최소한 향후 30년을 더 활동할 것을 염두에 두고 인생계획을 설계해야 한다’고 하였다. 설계의 선행 항목은 변화이다.
과거 경험으로 현재와 미래를 준비할 수가 없다. 경험의 유효기간이 지났다. ‘과거의 나’를 과감히 놓아 주자. 새로운 나를 만들어 가자. 은퇴는 삶을 송두리째 바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체적 노화와 잦은 질병은 자신감 결여와 자아존중감 상실 등 부정적 요인으로 귀결된다. 경제활동의 감소는 당당하였던 모습을 위축시킬 뿐 아니라 심리적 불안감이 커져 가족 상호간에 보이지 않는 ‘불신의 벽’이 된다. 사회적으로도 과거 경험의 ‘쓰임새’가 줄어들 때 비애감마저 든다. 공간적 디지털화는 디지털 원주민인 2030세대와 달리 중장년층은 ‘스마트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만든다. ‘공해’가 아닌 ‘노해(老害)’, ‘약육강식’이 아닌 ‘약육노식(弱肉老食)’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나이 듦’에 대한 사회적 배타적 시각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사회적 기능이 나를 변방으로 몰아내는 것 같다. 그 만큼 은퇴는 많은 것을 바꾸어 놓는다. 100세 시대는 인생 다작(多作)시대이다. ‘나만의 지도’를 그리고, 열린 사고의 ‘생각근육’을 단련시켜 심리적 안정이 도모될 때 웰에이징(Well Aging)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관계 민주화’의 실천과 ‘판사형’에서 ‘변호사형’으로 대화체를 바꾸어 가족과의 적정거리를 유지하자. 가족은 소유물이 아닌 인격체이다. 인격을 존중하자. 한 번 말하고, 두 번 듣고, 세 번 공감할 때 수직적 관계가 수평적으로 변한다. 이타적 말에 귀 기울이면 ‘안다가 인정으로, 인정은 수용으로, 수용은 이타적 존중’으로 승화될 수 있다. 지시와 명령의 판사형 말투가 ‘왜 그랬을까’,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이지’라는 상대방을 보듬어 안고 이해하려는 변호사형으로 바뀔 때 대화와 웃음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관계는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울고 넘는 박달재’를 찾던 아버지 세대와 100세 시대는 다르다. 일과 삶의 관점에서 100세 시대를 재조명해 보자. 다작(多作)시대에 나만의 ‘골든타임’을 찾아내자. 비즈니스에서 인성적으로 관계를 새롭게 맺어 보자. 상실되었던 자존감이 다시 회복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충만해 질수 있다. 풍부한 경험과 경륜이 불확실한 젊은이들의 앞길을 밝혀 주는 등불이 될 것이다. 나이와 변화는 비례해야 한다는 점을 반드시 명심하자.
박창동 HRD박사(KDB산업은행 교수/한국HR협회 HR칼럼니스트)
어릴 때 선반 위에 먹을 것을 찾으려고 까치발로 안간힘을 썼던 추억이 있다. 여의치 않으면 발 딛고 올라 설 수 있는 것을 찾았다. 이처럼 클 때에는 도구나 수단이 필요하였다. 나이가 들면서 성장기와 달리 어지간한 것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 살아 온 세월만큼 다양한 경험이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해 준다. 경험은 자신만이 살아 온 방법이자 상징이다. 경험이 고착화되면 고집 센 ‘외곬’이 된다. 고집은 ‘꼰대’로 접어드는 첩경이요, 변화의 길목에 걸림돌이 된다. ‘예전에 내가 해 봐서 아는데…..’를 버려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변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변화는 진화이다. 진화는 생존하기 위함이다. 오죽하면 모 그룹 회장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라고 외쳤을까. 진화론의 다윈은 ‘강한 것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강하다’라고 역설하였다. 4차 산업혁명시대의 변화 속도는 사칙연산의 산술급수적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이다. 어제의 진실이 오늘은 아닐 수도 있다. 지식도 유통기한이 있다. 한 번 배운 것으로 평생 먹고 사는 시대는 역사의 기록물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꼰대’가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 세상의 바뀜을 쉼 없이 배워야 한다. 배워야 변하고, 변해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게 되면 조직에서 물러난다. 약간의 불안과 두려움은 있지만, 누구나 겪게 되는 ‘은퇴’이다. 은퇴의 사전적 정의는 맡은 바 직책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서 한가로이 지내는 것이다. 필자는 기존의 정의와 달리 100세 시대의 은퇴(隱退)는 ‘자신의 물러남(退)을 알리지 말라(隱)’라고 해석한다.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이 살아 온 날만큼 남아 있기 때문이다. 피터 드러커는 ‘40년을 산 사람이라면 최소한 향후 30년을 더 활동할 것을 염두에 두고 인생계획을 설계해야 한다’고 하였다. 설계의 선행 항목은 변화이다.
과거 경험으로 현재와 미래를 준비할 수가 없다. 경험의 유효기간이 지났다. ‘과거의 나’를 과감히 놓아 주자. 새로운 나를 만들어 가자. 은퇴는 삶을 송두리째 바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체적 노화와 잦은 질병은 자신감 결여와 자아존중감 상실 등 부정적 요인으로 귀결된다. 경제활동의 감소는 당당하였던 모습을 위축시킬 뿐 아니라 심리적 불안감이 커져 가족 상호간에 보이지 않는 ‘불신의 벽’이 된다. 사회적으로도 과거 경험의 ‘쓰임새’가 줄어들 때 비애감마저 든다. 공간적 디지털화는 디지털 원주민인 2030세대와 달리 중장년층은 ‘스마트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만든다. ‘공해’가 아닌 ‘노해(老害)’, ‘약육강식’이 아닌 ‘약육노식(弱肉老食)’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나이 듦’에 대한 사회적 배타적 시각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사회적 기능이 나를 변방으로 몰아내는 것 같다. 그 만큼 은퇴는 많은 것을 바꾸어 놓는다. 100세 시대는 인생 다작(多作)시대이다. ‘나만의 지도’를 그리고, 열린 사고의 ‘생각근육’을 단련시켜 심리적 안정이 도모될 때 웰에이징(Well Aging)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관계 민주화’의 실천과 ‘판사형’에서 ‘변호사형’으로 대화체를 바꾸어 가족과의 적정거리를 유지하자. 가족은 소유물이 아닌 인격체이다. 인격을 존중하자. 한 번 말하고, 두 번 듣고, 세 번 공감할 때 수직적 관계가 수평적으로 변한다. 이타적 말에 귀 기울이면 ‘안다가 인정으로, 인정은 수용으로, 수용은 이타적 존중’으로 승화될 수 있다. 지시와 명령의 판사형 말투가 ‘왜 그랬을까’,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이지’라는 상대방을 보듬어 안고 이해하려는 변호사형으로 바뀔 때 대화와 웃음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관계는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울고 넘는 박달재’를 찾던 아버지 세대와 100세 시대는 다르다. 일과 삶의 관점에서 100세 시대를 재조명해 보자. 다작(多作)시대에 나만의 ‘골든타임’을 찾아내자. 비즈니스에서 인성적으로 관계를 새롭게 맺어 보자. 상실되었던 자존감이 다시 회복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충만해 질수 있다. 풍부한 경험과 경륜이 불확실한 젊은이들의 앞길을 밝혀 주는 등불이 될 것이다. 나이와 변화는 비례해야 한다는 점을 반드시 명심하자.
박창동 HRD박사(KDB산업은행 교수/한국HR협회 HR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