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태헌의 한역(漢譯)】
欲食素麪(욕식소면)
常曰人生世間事(상왈인생세간사)
誠如米飯毫無倦(성여미반호무권)
時時破舊飯館裏(시시파구반관리)
欲食老媼煮素麪(욕식로온자소면)
心傷人生轉角處(심상인생전각처)
步向街道獨輾轉(보향가도독전전)
賣牛歸人背影若(매우귀인배영약)
我欲與彼食素麪(아욕여피식소면)
世上固似大宴家(세상고사대연가)
何處不有欲泣人(하처불유욕읍인)
心門由是一二閉(심문유시일이폐)
黑暗如飢到夕曛(흑암여기도석훈)
淚痕不乾心自露(누흔불건심자로)
我欲與彼食溫麪(아욕여피식온면)
[주석]
* 欲食(욕식) : 먹으려고 하다, 먹고 싶다. / 素麪(소면) : 국수.
常曰(상왈) : 흔히 ~라고 말하다. / 人生世間事(인생세간사) : 사람이 세상에서 사는 일.
誠如(성여) : 정말 ~과 같다. / 米飯(미반) : 쌀밥. / 毫無倦(호무권) : 조금도 물리는 것이 없다.
時時(시시) : 때때로. / 破舊(파구) : 해어지고 낡다. / 飯館裏(반관리) : 식당 안.
老媼(노온) : 늙은 아주머니. / 煮素麪(자소면) : 국수를 끓이다, 끓인 국수.
心傷(심상) : 마음을 다치다, 마음이 상하다. /人生轉角處(인생전각처) : 인생이 모퉁이 지는 곳.
步向(보향) : ~로 걸어가다. / 街道(가도) : 거리. / 獨(독) : 홀로, 혼자. / 輾轉(전전) : 전전하다.
賣牛歸人(매우귀인) : 소를 팔고 돌아가는(오는) 사람. / 背影若(배영약) : 뒷모습과 같다.
我欲(아욕) : 나는 ~을 하고 싶다. / 與彼(여피) : 저들과 더불어, 그들과 더불어. / 食素麪(식소면) : 국수를 먹다.
世上(세상) : 세상. / 固似(고사) : 정말 ~과 같다. / 大宴家(대연가) : 큰 잔칫집.
何處(하처) : 어느 곳, 어디엔들. / 不有(불유) : 있지 않다. / 欲泣人(욕읍인) : 울고 싶은 사람.
心門(심문) : 마음의 문. / 由是(유시) : 이로 말미암아, 이 때문에. / 一二閉(일이폐) : 하나 둘 닫히다.
黑暗(흑암) : 암흑, 어둠. / 如飢(여기) : 허기처럼. / 到夕曛(도석훈) : 저녁 어스름에 이르다.
淚痕(누흔) : 눈물자국. / 不乾(불건) : 마르지 않다. / 心自露(심자로) : 마음이 저절로 드러나다.
食溫麪(식온면) : 따뜻한 국수를 먹다.
[직역]
국수가 먹고 싶다
흔히 말하기를, 사람이 세상 사는 일은
정말 밥과 같아 물리는 것 없다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늙은 아주머니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인생살이 모퉁이 지는 데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로 나서 홀로 전전하다 보면
소 팔고 돌아오는 사람 뒷모습 같은 이들 있나니
내 그들과 함께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정말 큰 잔칫집 같아도
어디엔들 울고 싶은 사람이 있지 않으랴!
마음의 문은 이 때문에 하나 둘 닫히고
어둠이 허기처럼 다가오는 저녁!
눈물자국 마르지 않아 맘 절로 드러나나니
내 그들과 함께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漢譯 노트]
고려(高麗) 시대에 밀가루로 만든 국수가 귀족들이 즐긴 고급 음식이 되었던 까닭은, 국수 제조 과정이 복잡하거나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 당시 한반도에 밀이 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수’의 또 다른 명칭인 ‘잔치국수’는 국수가 잔치를 할 때나 내놓았던 귀한 음식이었던 데서 유래한 말이다. 그러나 밀농사가 보편화 된 이후로 국수는 더 이상 고급 대접을 받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먹는 음식으로 간주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치국수’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쓰이고 있고, 결혼식 하객들에게 실제로 ‘잔치국수’를 대접하는 집들 역시 간간이 있다. 전통의 역사는 이토록 유구한 것이다.
역자는 이 시를 한역한 후에 원시(原詩)에 오·탈자가 없지는 않나, 행 나눔이 잘못되지는 않았나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과정에서 깜짝 놀라게 되었다. 원시의 제1행이 “국수가 먹고 싶다”로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자가 애초에 참고하였던 판본에는 분명 제1행이 없었던 관계로 정말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하여 수고롭게 한역(漢譯)을 새로 하는 대신에(?), 무례하게도 어느 쉬는 날 다소 늦은 저녁 시간에 이상국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 양해를 구하는 꼼수를 부리게 되었다. 호쾌하게 웃으시며 역자의 부주의와 게으름을 너그럽게 양해하신 선생님의 마음은, 허름한 식당에서 넉넉한 양으로 허기를 채우게 한 그 ‘어머니 같은 여자’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은 남몰래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그들이 흘린 눈물로 인해 세상의 반이 눈물이라 하여도 세상은 그래도 살 만한 곳이다. 눈물자국 때문에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낡은 이불처럼 남루하여도 따스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식과 위선이 없는 그 세상이 바로 낙원이 아니겠는가! 그런 곳에서 함께 하는 가난한 음식 국수야 말로 그 어떤 요리보다 값지지 않겠는가!
4연 20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역자는 3연 19행으로 오해한 상태에서 세 단락으로 구성된 도합 14구의 칠언고시(七言古詩)로 한역하였다. 단락마다 모두 짝수 구에 압운하였으며, 그 압운자는 ‘倦(권)’·‘麵(면)’, ‘轉(전)’·‘麵(면)’, ‘人(인)’·‘曛(훈)’·‘麵(면)’이다.
2019. 10. 1.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