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집에 못 가다, 정희성

집에 못 가다



정희성



어린 시절 나는 머리가 펄펄 끓어도 애들이 나 없이 저희들끼리만 공부할까봐 결석을 못했다 술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주인 여자가 어머 저는 애들이 저만 빼놓고 재미있게 놀까봐 결석을 못했는데요 하고 깔깔댄다 늙어 별 볼일 없는 나는 요즘 그 집에 가서 자주 술을 마시는데 나 없는 사이에 친구들이 내 욕할까봐 일찍 집에도 못 간다



【태헌의 한역(漢譯)】


不歸家(불귀가)



幼年時節有頭熱(유년시절유두열)


沸如湯水不缺席(비여탕수불결석)


但恐朋友除吾練(단공붕우제오련)


酒樓主媼聽所歷(주루주온청소력)


笑曰余亦無缺課(소왈여역무결과)


只恐朋友外余樂(지공붕우외여락)


老去無事多閑日(노거무사다한일)


吾人頻尋此酒樓(오인빈심차주루)


近來躊躇不歸家(근래주저불귀가)


唯恐朋友暗罵吾(유공붕우암매오)



【주석】


* 不歸家(불귀가) : 집에 돌아가지 못하다, 집에 못 가다.


幼年時節(유년시절) : 유년 시절, 어린 시절. / 有頭熱(유두열) : 머리(에) 열이 있다.


沸如(비여) : ~처럼 끓다. / 湯水(탕수) : 뜨거운 물. / 不缺席(불결석) : 결석하지 않다.


但恐(단공) : 다만 ~을 걱정하다. / 朋友(붕우) : 친구, 친구들. / 除吾練(제오련) : 나를 제외하고 ~을 익히다, 나를 빼고 공부하다.


酒樓(주루) : 술집. /主媼(주온) : 주인 여자, 여주인(女主人). / 聽所歷(청소력) : 겪은 바를 듣다, 겪은 일을 듣다.


笑曰(소왈) : 웃으면서 ~라고 말하다. / 余(여) : 나. / 亦(역) : 또, 또한. / 無缺課(무결과) : 결석이 없다, 결석하지 않다.


只恐(지공) : 다만 ~을 걱정하다. / 外余樂(외여락) : 나를 제외하고 ~을 즐기다, 나를 빼고 놀다.


老去(노거) : 늙어가다. / 無事(무사) : 일이 없다. / 多閑日(다한일) : 한가한 날이 많다.


吾人(오인) : 나. / 頻尋(빈심) : 자주 ~을 찾다. / 此酒樓(차주루) : 이 술집.


近來(근래) : 요즘(에). / 躊躇(주저) : 주저하다, 머뭇거리다.


唯恐(유공) : 다만 ~을 걱정하다. / 暗(암) : 몰래. / 罵吾(매오) : 나를 욕하다.



【직역】


집에 못 가다



어린 시절에 머리에 열이 있어


뜨거운 물처럼 끓어도 결석 못했던 건


친구들이 나 빼고 공부할까 걱정해서였는데


술집 여주인이 내 겪은 일 듣더니


웃으며 말하길, “저도 결석이 없었는데


친구들이 저 빼고 즐길까 걱정해서였죠.”라네.


늙어가며 일도 없고 한가한 날 많아


나는 자주 이 술집을 찾는데


요즘에 머뭇거리며 집에도 못가는 것은


친구들이 몰래 나를 욕할까 걱정해서라네.



【漢譯 노트】


노년에 접어든 시인이 이따금 술집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소일하는 일상을 유머러스하게 노래한 이 시는, 연이나 행 구분이 따로 없는 산문시이다. 이러한 산문시를 운문시처럼 번역한 것은 역자도 처음이지만 감상하는 독자들 또한 거의 처음일 듯하다. 산문시는 산문시로서의 강점이 있는 건데 운문 스타일로 번역을 했으니 그 강점이 다소 손상되지는 않았을까 염려스럽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든 번역은 기본적으로 원의(原義)의 손상을 어느 정도 각오해야만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이를 감안한다면 운문 스타일의 번역이어도 감상은 무난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역자는 이 시를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아프던 아프지 않던 학교에 간 모범생과 날라리(?)의 모습을 떠올려보노라면 저절로 웃음이 난다. 가지고 놀 것도, 펼치고 볼 것도 변변치 못했던 그 시절 아이들이 대개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자는 아주 가끔 몇몇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에 가지 않기도 했는데, 그 당시에는 이를 ‘중간학교’라고 불렀다. 집에서는 분명 학교에 간다고 나섰지만 학교에는 도착하지 않고 중간에서 학생들끼리 여는 학교라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음직한 이 ‘중간학교’는, 한편으로는 들켜서 되게 혼날까봐 걱정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학교를 땡땡이치고 노는 재미가 어디 비할 데 없이 오졌던 다소 위험한 놀이(?)였다.


비닐봉지에 꼭꼭 싸서 숨겨놓은 성냥 한 통만 있으면 시골 아이들이 못할 일은 거의 없었다. 책가방이나 책보는 저만치 던져두고, 뛰어다니며 잡은 떡개구리 뒷다리를 구워먹거나 서리한 고구마를 구워먹고, 풀밭에 드러누워 배를 두드리며 까르륵대던 그 재미가 어찌나 쏠쏠했던지…. 어쨌거나 ‘중간학교’가 나쁜 짓이라는 것은 다들 알아서 어른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불도 조심조심 피웠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소년 시절 추억의 자리 그쯤에 지금도 성냥갑이 숨겨져 있을까?


역자는 산문시인 원시를 10구로 이루어진 칠언고시로 재구성하였다. 한역시는 짝수 구에 압운하였지만 제8구에서 한 번 운을 바꾸었다. 한역시의 압운자는 ‘席(석)’·‘歷(력)’·‘樂(락)’, ‘樓(루)’·‘吾(오)’이다.


2019. 10. 15.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