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영화에 기대어 쓰다] 구병모, <단 하나의 문장> 안식과 불안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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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 시골에서 몇 년을 살았던 때가 있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덕분에 시골생활에 대해서는 ‘경치 좋고 인심 좋은 곳’이라는 막연하고도 추상적인 지식만이 내가 아는 전부였다. 하지만 막상 시골에서의 생활은 기대했던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아서 심심하고 답답한 것은 둘째치고 그들의 ‘배려’가 나에게는 느닷없는 ‘침입’으로 간주되는 상황 때문이었다.
새로 이사 온 사람의 숟가락, 젓가락 개수까지 궁금해하는 이웃집 할머니의 ‘도가 넘는 호기심’, 사흘이 멀다 하고 음식 접시나 채소 보따리를 들이밀며 ‘이웃 간의 정’을 되새겨 주는 옆 집 아줌마, ‘혼자서 뭐 해? 빨리 와. 부침개 했어’ 라며 채근하는 아랫집 여자의 ‘배려’는 견디기 힘든 고문이었다. 채 친해지기도 전에, 아니, 영원히 친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허락도 없이 경계를 마구 넘나드는 상황은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젊은 사람이 별나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적당히 맞장구쳐 주고 때가 되면 일정한 간격으로 웃어 주기도 했지만 마땅히 누려야 하는 정당한 ‘고독’과 ‘자유’가 자꾸만 침해당한다는 억울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심신이 지쳐갔다. 섞여 들기를 거부하고 홀수로 남기를 자처한 대가는 마음 둘 데 없는 외로운 시간이었다. 외로움의 지층만 무수히 쌓여가던 젊은 날은 대책없이 흘러갔고 마침내 시골에서의 생활이 종지부를 찍는 날이 왔다.당시의 경험은 트라우마처럼 희미한 흔적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구병모 소설집 <단 하나의 문장>에 수록된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란 단편을 읽는 동안 예전 시골생활이 떠올랐다. 소설은 남편의 갑작스러운 발령으로 시골로 내려간 임산부 정주가 그곳에서 마을 사람들과 겪는 불편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다.
마당으로 들어선 할머니가 정주의 나온 배를 보고 “어디 보자, 배가 크고 펑퍼짐하니 아래로 처진 게 딱 고추네” 그렇게 말하며 노부인의 손길이 배를 슬쩍 건드리는 순간 정주는 이루 말하기 힘든 감정에 사로잡혔지만 산골 어르신이니까 이해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스렸다.
– <단 하나의 문장> –
지극히 사적인 영역인 출산이 노인의 참견으로 인해 공동의 관심사가 되어 버린 상황이 정주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주었고 공동체 생활에 대한 환멸을 불러 일으켰다.
여자들이 일하다 밭고랑에 주저앉아 낫으로 탯줄을 끊었다느니, 집에서 돌보는 게 당연한 것을 무슨 애 놓는데 호텔씩이나 잡아 들어가느냐든지, 한 사나흘 자리보전하며 미역국 먹고 나면 으레 다시 밭일하러 애를 업고 나오는 법이라는 19세기 레퍼토리가 한 치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돌림노래처럼 흘러나왔으며… – <단 하나의 문장> –
과거 경험에 갇혀 전근대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고 쏟아내는 그녀들의 말에 일일이 대응해봤자 허공에서 분해되어 사라질뿐이란 걸 알았기에 급한 일이 있다고 둘러대고 서둘러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정주가 느꼈던 예민함과 불편함의 기저에는 ‘거리의 소멸’이 있었다. 배려 차원에서 문을 열어주고 앞을 살펴주는가 하면 마치 며느리나 딸이라도 되는 양 정주의 어깨와 등을 쓸어내리는 산골 할머니의 행위는 타인과 자신의 사이에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믿었던 적절한 거리를 자꾸만 침해했기 때문이었다. 관계란 적절한 거리가 확보되었을때에 비로소 맺어질 수 있다는 전제를 무시한 행위로 인해 정주는 상처받았다. 결국 그녀는 누구도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 또한 그들을 모르는 수천 수만의 얼굴이 있는 세계로 다시 돌아오기로 한다. 서로 잘 안다고 믿는 세계에서의 ‘안식’ 대신에 모르는 세계에서의 ‘불안’을 선택한 것이다.
또 다른 단편, <지속되는 호의> 는 그동안 내가 그어놓았던 수많은 ‘금’을 돌아보게 했다. 주인공 서영은 타인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윤리적으로 적당한 선에서만 호의를 베푸는 도시생활에 최적화된 여자다. 그녀에게서 관계란 ‘상대에게 자신의 모두를 내맡기지 않기, 무엇보다 상대를 온몸으로 느끼지 않기’로 요약되는 삶을 의미했다. 아들 상휘를 데리고 수영장에 평온한 일상을 즐기던 그녀에게 갑작스레 나타난 어린 남매의 장난기는 평화로웠던 그녀의 삶을 급작스런 위기로 몰아간다. 아이의 연이은 장난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예의 바르게 대응했고 마지막까지 호의를 베풀었지만 결국 아들 상휘를 잃어버리는 긴박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인산인해의 해수욕장에서 아이를 찾아 헤매는 서영과 남편의 다급함은 타인에 의해 쉽게 외면당하고 ‘어디서 잠깐 놀다 오나 보지. 뭘 저리 유난을…’이라는 타인들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 속에 묻히고 만다. 정주의 삶이 끝도 모를 악몽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지점이다.
누구에게도 간섭받기 싫어하고 보이지 않은 금을 그은 채 적당한 거리를 두고 타인을 바라보는 대도시에서의 삶은 서영의 공포와 불행을 멀찍이 두고만 볼뿐이다. 이러한 무관심은 대도시의 삶 속에서 오히려 정당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상호의존의 관계 속에서 적당히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두 작품은 자유로움을 위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배려’로 위장한 이기적인 도시인들과 무시로 내 경계가 침범당하는 당혹스러움을 감수하고 원치 않는 배려를 받으며 서로를 잘 안다고 여기는 시골에서의 삶. 자유롭지만 불안한 관계와 불편함을 감수하고 얼마간 얻게 되는 배려와 안식의 적절한 거리는 어디쯤인가를 묻는다.
‘외로운 타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가능한 공동체를 위해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방어선을 확보해야 하는가에 대한 나의 선택은 무엇일까?
하지만 ‘젊은 사람이 별나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적당히 맞장구쳐 주고 때가 되면 일정한 간격으로 웃어 주기도 했지만 마땅히 누려야 하는 정당한 ‘고독’과 ‘자유’가 자꾸만 침해당한다는 억울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심신이 지쳐갔다. 섞여 들기를 거부하고 홀수로 남기를 자처한 대가는 마음 둘 데 없는 외로운 시간이었다. 외로움의 지층만 무수히 쌓여가던 젊은 날은 대책없이 흘러갔고 마침내 시골에서의 생활이 종지부를 찍는 날이 왔다.당시의 경험은 트라우마처럼 희미한 흔적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구병모 소설집 <단 하나의 문장>에 수록된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란 단편을 읽는 동안 예전 시골생활이 떠올랐다. 소설은 남편의 갑작스러운 발령으로 시골로 내려간 임산부 정주가 그곳에서 마을 사람들과 겪는 불편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다.
마당으로 들어선 할머니가 정주의 나온 배를 보고 “어디 보자, 배가 크고 펑퍼짐하니 아래로 처진 게 딱 고추네” 그렇게 말하며 노부인의 손길이 배를 슬쩍 건드리는 순간 정주는 이루 말하기 힘든 감정에 사로잡혔지만 산골 어르신이니까 이해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스렸다.
– <단 하나의 문장> –
지극히 사적인 영역인 출산이 노인의 참견으로 인해 공동의 관심사가 되어 버린 상황이 정주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주었고 공동체 생활에 대한 환멸을 불러 일으켰다.
여자들이 일하다 밭고랑에 주저앉아 낫으로 탯줄을 끊었다느니, 집에서 돌보는 게 당연한 것을 무슨 애 놓는데 호텔씩이나 잡아 들어가느냐든지, 한 사나흘 자리보전하며 미역국 먹고 나면 으레 다시 밭일하러 애를 업고 나오는 법이라는 19세기 레퍼토리가 한 치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돌림노래처럼 흘러나왔으며… – <단 하나의 문장> –
과거 경험에 갇혀 전근대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고 쏟아내는 그녀들의 말에 일일이 대응해봤자 허공에서 분해되어 사라질뿐이란 걸 알았기에 급한 일이 있다고 둘러대고 서둘러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정주가 느꼈던 예민함과 불편함의 기저에는 ‘거리의 소멸’이 있었다. 배려 차원에서 문을 열어주고 앞을 살펴주는가 하면 마치 며느리나 딸이라도 되는 양 정주의 어깨와 등을 쓸어내리는 산골 할머니의 행위는 타인과 자신의 사이에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믿었던 적절한 거리를 자꾸만 침해했기 때문이었다. 관계란 적절한 거리가 확보되었을때에 비로소 맺어질 수 있다는 전제를 무시한 행위로 인해 정주는 상처받았다. 결국 그녀는 누구도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 또한 그들을 모르는 수천 수만의 얼굴이 있는 세계로 다시 돌아오기로 한다. 서로 잘 안다고 믿는 세계에서의 ‘안식’ 대신에 모르는 세계에서의 ‘불안’을 선택한 것이다.
또 다른 단편, <지속되는 호의> 는 그동안 내가 그어놓았던 수많은 ‘금’을 돌아보게 했다. 주인공 서영은 타인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윤리적으로 적당한 선에서만 호의를 베푸는 도시생활에 최적화된 여자다. 그녀에게서 관계란 ‘상대에게 자신의 모두를 내맡기지 않기, 무엇보다 상대를 온몸으로 느끼지 않기’로 요약되는 삶을 의미했다. 아들 상휘를 데리고 수영장에 평온한 일상을 즐기던 그녀에게 갑작스레 나타난 어린 남매의 장난기는 평화로웠던 그녀의 삶을 급작스런 위기로 몰아간다. 아이의 연이은 장난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예의 바르게 대응했고 마지막까지 호의를 베풀었지만 결국 아들 상휘를 잃어버리는 긴박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인산인해의 해수욕장에서 아이를 찾아 헤매는 서영과 남편의 다급함은 타인에 의해 쉽게 외면당하고 ‘어디서 잠깐 놀다 오나 보지. 뭘 저리 유난을…’이라는 타인들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 속에 묻히고 만다. 정주의 삶이 끝도 모를 악몽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지점이다.
누구에게도 간섭받기 싫어하고 보이지 않은 금을 그은 채 적당한 거리를 두고 타인을 바라보는 대도시에서의 삶은 서영의 공포와 불행을 멀찍이 두고만 볼뿐이다. 이러한 무관심은 대도시의 삶 속에서 오히려 정당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상호의존의 관계 속에서 적당히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두 작품은 자유로움을 위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배려’로 위장한 이기적인 도시인들과 무시로 내 경계가 침범당하는 당혹스러움을 감수하고 원치 않는 배려를 받으며 서로를 잘 안다고 여기는 시골에서의 삶. 자유롭지만 불안한 관계와 불편함을 감수하고 얼마간 얻게 되는 배려와 안식의 적절한 거리는 어디쯤인가를 묻는다.
‘외로운 타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가능한 공동체를 위해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방어선을 확보해야 하는가에 대한 나의 선택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