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범의 셀프 리더십] 문(門)을 열지 못하는 빨간 자물쇠 “발열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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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크고 작은 문(門)들이 굳게 닫히고 있다. 국가의 관문인 공항이 그렇고, 생산 공장의 정문, 학교의 교문, 하다못해 소규모 점포의 문까지 자물쇠가 채워지는 상황이다.
門(문)이란 두 개의 문짝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상으로, 집으로 들어가기 위한 큰 대문을 이르는 말이다.
門(문)의 의미를 헤아릴 수 있는 좋은 예가 있다. 사찰의 일주문(一柱門)이 그것이다. 일주문(一柱門)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으로 “신성한 사찰로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아침 7시, 출근하기 위해 주택 현관을 나섰다. 마스크를 쓴 채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 전철로 갈아탄다. 그
리고 잠실 역에서 내린 후 약 1,000보 가량 걸으면 필자가 몸 담고 있는 빌딩 Tower 730 정문에 이른다.
입구인 회전 문을 지나면 열 화상 카메라 두 대가 보이기 시작한다. 안내 선을 따라 엘리베이터까지 도달하는 약 15m 구간을 걷다 보면 약간의 긴장감이 밀려온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말이다. 열 화상 카메라와 연결된 체온 감지 시스템 부자가 울릴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정상 체온을 유지하고 있지만 막상 회사 정문 앞에 도착하면 습관적으로 이마에 손을 댄다. 물론 차갑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 화상 카메라의 눈은 나를 긴장 하게 만든다. 무사히 정문을 통과하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27층을 향한다. 엘리베이터가 열리면 또 하나의 절차와 마주하게 된다. 통과 의례의 마지막은 역시 체온 체크다. 직원이 내민 체온계에 이마를 댄다. 36.1도, 사무실에 들어갈 수 있는 오늘의 커트라인을 통과했다.
門(문)을 열려면 약속된 통과 의례 절차를 거쳐야 한다.
국가의 관문인 공항이 그렇고, 회사의 정문이나 주택 현관을 통과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코로나 19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통과 절차는 더욱 엄격하고 까다로워졌다. 지금은 코로나 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사회적거리 두기가 한창이다. 잠시 멈춰 서서 움직임을 자제하라는 정부의 권고가 일상이 된 요즘이다. 그렇다 보니 일상적으로 용인되던 통과 절차만으론 문이 열리지 않는다. 코로나 19로 인한 빗장이 더욱 강화된 탓이다. 집에서 회사 정문까지는 자기 통제의 범위에 해당한다. 하지만 회사 정문에 들어서면 통제의 주체는 회사로바뀐다. 어제까지 무사히 통과했다고 오늘도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통과 의례 절차는 1회용이다. 매번 해당 절차를 따라야 한다. 지금은 회사가 발급한 사원증과, 정상 체온이 확인되어야 통과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오죽하면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회사로 복귀하는 중에도 두 대의 열 화상 카메라의 허락을 득해야 가능하니 말이다.
門(문)을 무사히 통과하려면 거쳐야할 절차가 있다. 크게 보면 자기 통제와 집단 통제가 그것이다.
코로나19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1차 통제라면 집단 통제는 2차 통제인 셈이다. 이 두 가지 통제가 무너지면사회적 혼란이 가중되고 급기야는 개인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극단적 조치까지 감수해야 한다. 그러므로 1차 통제의 주체인 자신을 통제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통제하지 않는 다면 이는 무책임한 이기주의자로 낙인 찍힐 수도 있다.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내세우느라,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일이 발생했다면 궁극적으론 타인의 자유를 훔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론 무증상으로 인해 누구도 알지 못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확진 판정을 받았거나 접촉 사실을 알면서도 자기 통제를 소홀히 했다면 그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자유는 개인의 것 이전에 우리 모두의 것이다. 때론 공동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잠시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다. 공존은 그런 것이고,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세계인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잠시 통제해야 하는 시점 말이다.
門(문)은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는 상징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끊어 냄과 이어짐의 경계이기도 하다. 우리모두가 지난날처럼 자유롭게 왕래하길 원한다면 자기 통제와 집단 통제를 긍정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스스로 자기 통제를 허물고 집단 통제를 헤친다면 공공의 적이라 할 수 있다. 코로나 19 때문에 우리의 일상이 헝클어지고 무고한 생명이 쓰러지게 할 순 없다.
지금은 모두의 행복을 위해 해야 할 첫 번째 공동 미션은 일백 번을 말해도 자기 통제다. 제발, 개인과 집단의 이기적 사고와 행동으로 인해 코로나 19에 맞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선량한 국민들을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종범 한경닷컴 칼럼니스트
門(문)이란 두 개의 문짝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상으로, 집으로 들어가기 위한 큰 대문을 이르는 말이다.
門(문)의 의미를 헤아릴 수 있는 좋은 예가 있다. 사찰의 일주문(一柱門)이 그것이다. 일주문(一柱門)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으로 “신성한 사찰로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아침 7시, 출근하기 위해 주택 현관을 나섰다. 마스크를 쓴 채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 전철로 갈아탄다. 그
리고 잠실 역에서 내린 후 약 1,000보 가량 걸으면 필자가 몸 담고 있는 빌딩 Tower 730 정문에 이른다.
입구인 회전 문을 지나면 열 화상 카메라 두 대가 보이기 시작한다. 안내 선을 따라 엘리베이터까지 도달하는 약 15m 구간을 걷다 보면 약간의 긴장감이 밀려온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말이다. 열 화상 카메라와 연결된 체온 감지 시스템 부자가 울릴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정상 체온을 유지하고 있지만 막상 회사 정문 앞에 도착하면 습관적으로 이마에 손을 댄다. 물론 차갑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 화상 카메라의 눈은 나를 긴장 하게 만든다. 무사히 정문을 통과하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27층을 향한다. 엘리베이터가 열리면 또 하나의 절차와 마주하게 된다. 통과 의례의 마지막은 역시 체온 체크다. 직원이 내민 체온계에 이마를 댄다. 36.1도, 사무실에 들어갈 수 있는 오늘의 커트라인을 통과했다.
門(문)을 열려면 약속된 통과 의례 절차를 거쳐야 한다.
국가의 관문인 공항이 그렇고, 회사의 정문이나 주택 현관을 통과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코로나 19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통과 절차는 더욱 엄격하고 까다로워졌다. 지금은 코로나 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사회적거리 두기가 한창이다. 잠시 멈춰 서서 움직임을 자제하라는 정부의 권고가 일상이 된 요즘이다. 그렇다 보니 일상적으로 용인되던 통과 절차만으론 문이 열리지 않는다. 코로나 19로 인한 빗장이 더욱 강화된 탓이다. 집에서 회사 정문까지는 자기 통제의 범위에 해당한다. 하지만 회사 정문에 들어서면 통제의 주체는 회사로바뀐다. 어제까지 무사히 통과했다고 오늘도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통과 의례 절차는 1회용이다. 매번 해당 절차를 따라야 한다. 지금은 회사가 발급한 사원증과, 정상 체온이 확인되어야 통과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오죽하면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회사로 복귀하는 중에도 두 대의 열 화상 카메라의 허락을 득해야 가능하니 말이다.
門(문)을 무사히 통과하려면 거쳐야할 절차가 있다. 크게 보면 자기 통제와 집단 통제가 그것이다.
코로나19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1차 통제라면 집단 통제는 2차 통제인 셈이다. 이 두 가지 통제가 무너지면사회적 혼란이 가중되고 급기야는 개인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극단적 조치까지 감수해야 한다. 그러므로 1차 통제의 주체인 자신을 통제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통제하지 않는 다면 이는 무책임한 이기주의자로 낙인 찍힐 수도 있다.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내세우느라,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일이 발생했다면 궁극적으론 타인의 자유를 훔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론 무증상으로 인해 누구도 알지 못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확진 판정을 받았거나 접촉 사실을 알면서도 자기 통제를 소홀히 했다면 그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자유는 개인의 것 이전에 우리 모두의 것이다. 때론 공동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잠시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다. 공존은 그런 것이고,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세계인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잠시 통제해야 하는 시점 말이다.
門(문)은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는 상징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끊어 냄과 이어짐의 경계이기도 하다. 우리모두가 지난날처럼 자유롭게 왕래하길 원한다면 자기 통제와 집단 통제를 긍정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스스로 자기 통제를 허물고 집단 통제를 헤친다면 공공의 적이라 할 수 있다. 코로나 19 때문에 우리의 일상이 헝클어지고 무고한 생명이 쓰러지게 할 순 없다.
지금은 모두의 행복을 위해 해야 할 첫 번째 공동 미션은 일백 번을 말해도 자기 통제다. 제발, 개인과 집단의 이기적 사고와 행동으로 인해 코로나 19에 맞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선량한 국민들을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종범 한경닷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