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파도, 유승우

파도



유승우



파도에게 물었습니다.


왜 잠도 안자고,


쉬지도 않고,


밤이나 낮이나 하얗게 일어서느냐고,


일어서지 않으면


내 이름이 없습니다.


파도의 대답입니다.



【태헌의 한역】


波濤(파도)



問於波濤曰(문어파도왈)


何不入夢中(하불입몽중)


亦不暫時休(역불잠시휴)


晝夜白洶溶(주야백흉용)


波濤乃對曰(파도내대왈)


不興吾名空(불흥오명공)



[주석]


* 波濤(파도) : 파도.


問於(문어) : ~에게 묻다. / 曰(왈) : ~라고 말하다.


何不(하불) : 어째서 ~을 하지 않는가? / 入夢中(입몽중) : 꿈속에 들다, 잠이 들다.


亦不(역불) : 또한 ~을 하지 않다. / 暫時(잠시) : 잠시. / 休(휴) : 쉬다.


晝夜(주야) : 밤낮, 밤낮으로. / 白(백) : 희다, 희게, 하얗게. /洶溶(흉용) : 물결이 치솟아 오르다, 물결이 일어서다.


乃(내) : 이에. / 對曰(대왈) : 대답하여 ~라고 말하다, ~라고 대답하다.


不興(불흥) : 일어나지 않다, 일어서지 않다. / 吾名(오명) : 나의 이름. / 空(공) : 비다, 다하다, 없다.



[직역]


파도



파도에게 물었습니다.


“어째서 잠도 안자고


또 잠시 쉬지도 않고


밤이나 낮이나 하얗게 일어서나요?”


파도가 이에 대답합니다.


“일어서지 않으면 내 이름이 없습니다.”



[한역 노트]


역자는 이 시를 처음 보았을 때 마지막 구에서 왜 ‘이름’이라고 했을까 하며 다소 의아해 하였다. 그러나 시간을 두고 몇 차례 읽어보고는 시인이 얘기한 ‘이름’의 의미를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역자는 이 시에서의 ‘이름’을 존재를 증명해줄 수 있는 ‘존재의 정체성(正體性)’으로 파악하였다. 파도가 일어서지 않는다면 어찌 파도가 파도이겠는가? 그리고 파도가 없다면 바다가 과연 바다이겠는가? 그러므로 파도의 입장에서 보자면 파도가 파도이기 위해, 또 바다를 바다로 만들기 위해 일어서야만 하는 것이다.


우선 다음 한문을 보도록 하자.


龍雨龍雨龍雨龍龍龍不雨龍龍龍雨龍雨


‘용 룡 자[龍]’와 ‘비 우 자[雨]’, ‘아닐 불 자[不]’ 이렇게 단 세 글자로만 구성된 문장인데, 이 문장을 처음 본다면 한문을 제법 공부했다는 독자들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혹시 이 문장을 본 적이 있고 의미까지 정확하게 아는 독자가 있다면, 아마도 애산(愛汕) 권중구(權重求) 선생이 지은 ≪한문대강(漢文大綱)≫이라는 책을 본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역자는 위의 문장을 대학 시절에 ≪한문대강≫에서 처음으로 접했는데, ‘선생’이 된 이후에는 한문 관련 수업 시간에 현토(懸吐:한문에 토를 다는 일)에 대하여 강의할 때 자주 예시(例示)하였다. 그러므로 역자에게 수업을 들었던 제자들도 이 문장의 뜻을 알고 있을 듯하다. 이제 역자가 ‘현토’를 하여 읽어보겠다.


龍아 雨하라 龍아 雨하라 龍이 雨라야 龍이 龍이지 龍이 不雨면 龍이 龍이런가 龍아 雨하라 龍아 雨하라


이렇게 현토를 해서 읽었는데도 아직 이해가 안 되는, 다시 말해 한문을 거의 전혀 모르는 독자들을 위하여 이제 번역을 해보겠다. ‘雨’가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쓰였다는 사실에 주의하기 바란다.


용아, 비를 내려라! 용아, 비를 내려라! 용이 비를 내려야 용이 용이지, 용이 비를 내리지 않는다면 용이 용이냐? 용아, 비를 내려라! 용아, 비를 내려라!


이제 이 문장이 하나의 기우제문(祈雨祭文)임을 알았을 것이다. 역자가, 출처가 불분명한 이 문장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까닭은 자명하다. “용이 비를 내려야 용이 용이지, 용이 비를 내리지 않는다면 용이 용이냐?” 이 대목을 용이 듣고는 화가 나서 비를 억수로 퍼부었다는 전설의 핵심 – 바로 ‘존재의 정체성’을 예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들은 용이 비를 내리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역자는 유승우 시인의 위의 시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그 존재의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고 나서, ‘이름값도 못한다’는 말을 떠올려보며 역자 자신을 아프게 반성하였다. 그러고 보니 ‘이름값’의 ‘이름’이 바로 시인이 얘기한 그 ‘이름’과 비슷한 맥락이다. 어느 위치에 있던,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존재의 정체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다. 곧 그 자리에 맞지 않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니 어찌 이 시가 두렵게 읽히지 않겠는가!


연 구분 없이 7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역자는 6구의 오언고시(五言古詩)로 한역(漢譯)하였다. 한역시는 짝수 구마다 압운하였으며, 그 압운자는 ‘中(중)’·‘溶(용)’·‘空(공)’이다.


2020. 5. 12.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