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범의 셀프 리더십] 치우치지 않는 리더십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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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야)는 성 밖의 마을을 뜻하는 ‘里(리)’와 여유 있다는 뜻의 ‘予(여)’가 합해진 것으로 “성 밖의 마을에서 한가롭게 살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욕망하는 천자문-문자 속에 숨은 권력, 천자문 다시 읽기 / 김근 저≫
야(野)는 바깥이고 외부를 뜻한다. 야성이 강한 동물이나 식물을 울타리 친 내부에 드리면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생존하는 환경에 익숙한 진화를 거친 때문이다. 야생마는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기 때문에 특별한 조련을 거치지 않으면 통제할 수 없다. 야생화도 마찬가지다. 자연 변화에 맞서 스스로 생존했기 때문에 인위적 통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순수한 아름다움이 넘쳐나는 이유다. 동면하는 식물의 대부분은 뿌리의 힘이 강하다. 온실 속에서 인간의 보살핌을 받는 화초는 날씨가 추워지면 대부분 죽는다. 하지만 야생에서 살고 지는 야생화는 다르다. 날씨가 추워지면 생존에 필요한 갖가지 요소를 뿌리에 간직하고 있다가 따듯한 봄이 오면 움츠렸던 생명력을 복원시킨다. 땅 위로 싹이 돋는 것도, 바짝 마른 나뭇가지에서 부드럽고 유연한 힘이 느껴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살아 있음을 알리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야(野)가 지닌 생명력이다.
라일락 두 구루를 키우는데, 해마다 필자를 괴롭힌다. 뿌리는 땅 속으로 자라고 줄기는 땅 위로 자라는 게 일반적 상식이지만, 라일락은 땅 속에서 땅 위로 올라오는 나무 줄기가 너무 많다. 해마다 본래의 나무 줄기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잘라주지만 그때뿐이다. 해가 바뀌고 봄이 오면 스멀스멀 땅을 헤집고 올라오는 줄기들이 그득해진다. 투덜거리며 자르기를 벌써 몇 해인지 모르겠다. 라일락은 뿌리와 줄기로 구분되는 것을 거부하고 싶은 가 보다. 뿌리 대신 줄기가 되어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싶어 안달인 것처럼 극성이니 말이다.
통제되지 않는 것이 야(野)의 매력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때론 통제된 야(野) 성이 건강한 생명력을 유지하는데 더없이 소중한 양분이 된다. 문제는 중심을 잡는 것인데, 이 부분에서 건강한 야성과 그렇지 못한 야성이 갈린다. 리더십 스토리셀러, CEO 리더십 연구소 김성회 소장은 그의 저서 『리더를 위한 한자 인문학』 에서 야(野)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야(野)는 마을로부터 떨어져서 꾸미지 않은 본래 모습의 들, 벌판을 가리킨다. 사람이 북적이는 동네가 읍(邑)이라면 그 바깥쪽이 교(郊)이고, 그 너머가 야(野)다. 야(野)를 넘어선 바깥쪽이 임(林), 거기서 더 멀리 떨어지면 경(冂)이 된다. 그러니까 사람이 북적이는 동네와 우거진 숲 사이가 야(野)다. 경(冂)이나 임(林)으로 치우치면 야만스럽고, 교(郊)와 읍(邑)에서만 복작거리면 고유의 본성을 잃고 퇴화한다”
치우침을 경계하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정치적 관점으로 접근해도 틀리지 않는다. 이번 21대 총선에서 제 1 야당은 참패를 면치 못했다. 극우 성향을 끌어 안다 보니 야만스럽게 비춰진 면이 강했다. 덕분에 중도 표심이 들어갈 공간은 턱 없이 좁았다.대안도 없으면서 사사건건 반대만 일삼는 모습에선 국민적 피로감만커졌다. 포용은 없고 투쟁만 일삼는 극단적 쏠림 속에 발생한 C19는, 야당의 목소리를 지워버리기에 충분했다. 선거 유세 막판에 터진 막말은 야만스러운 이미지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생각지도 않았던 위성 정당까지 만들면서 꼼수 정치의 진수를 선보였다.이는 결국 소수 정당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려던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본래 취지를 제1 야당이 앞장서서 짓밟은 꼴이 되고 말았다.
덕분에 소수 정당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게 되었고, 교(郊)와 읍(邑)에서 복작거리다 보니 야(野)가 지녀야 할 고유의 본성은 물론,그나마 가지고 있었던 힘을 잃어버리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다.
이미 지난 이야기지만 이번 21대 총선은 야(野)가 지녀야 할 특유의 유연성이 사라지고, 거친 야성이 필요 이상 어필될 경우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경험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야당을 이끌어 갈 지도자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가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국민의 소리를 대변하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이는 비단 야당만의 몫은 아니다.
광야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를 외면하는 순간 여당도 야당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 가정, 집단, 국가를 막론하고, 따르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그때부터는 리더라고 할 수 없다. 조직 구성원이 리더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 말은 허공으로 흩어지는 소음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1대 국회는 여도 야도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리더십이 발휘될 수 있어야 한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꼴사나운 여당의 모습도, 나약하고 무기력한 야당의 모습도 원치 않는다. 협치를 내세우면서 뜻대로 안 되면 상대 당을 탓하면서, 문을 걸어 잠그고 독주하는 이상한 정치도 원치 않는다. 현재의 표를 얻기 위해 미래의 위험을 외면하는 포퓰리즘성유혹도 경계해 주길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새로 시작된 국회에 한 가지는 분명하게 주문하고 싶다. 제발 국민의 소리를 잘 듣고 반영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국회다운 국회, 의원 다운 의원으로 기억되길 희망한다.
야(野)는 바깥이고 외부를 뜻한다. 야성이 강한 동물이나 식물을 울타리 친 내부에 드리면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생존하는 환경에 익숙한 진화를 거친 때문이다. 야생마는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기 때문에 특별한 조련을 거치지 않으면 통제할 수 없다. 야생화도 마찬가지다. 자연 변화에 맞서 스스로 생존했기 때문에 인위적 통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순수한 아름다움이 넘쳐나는 이유다. 동면하는 식물의 대부분은 뿌리의 힘이 강하다. 온실 속에서 인간의 보살핌을 받는 화초는 날씨가 추워지면 대부분 죽는다. 하지만 야생에서 살고 지는 야생화는 다르다. 날씨가 추워지면 생존에 필요한 갖가지 요소를 뿌리에 간직하고 있다가 따듯한 봄이 오면 움츠렸던 생명력을 복원시킨다. 땅 위로 싹이 돋는 것도, 바짝 마른 나뭇가지에서 부드럽고 유연한 힘이 느껴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살아 있음을 알리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야(野)가 지닌 생명력이다.
라일락 두 구루를 키우는데, 해마다 필자를 괴롭힌다. 뿌리는 땅 속으로 자라고 줄기는 땅 위로 자라는 게 일반적 상식이지만, 라일락은 땅 속에서 땅 위로 올라오는 나무 줄기가 너무 많다. 해마다 본래의 나무 줄기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잘라주지만 그때뿐이다. 해가 바뀌고 봄이 오면 스멀스멀 땅을 헤집고 올라오는 줄기들이 그득해진다. 투덜거리며 자르기를 벌써 몇 해인지 모르겠다. 라일락은 뿌리와 줄기로 구분되는 것을 거부하고 싶은 가 보다. 뿌리 대신 줄기가 되어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싶어 안달인 것처럼 극성이니 말이다.
통제되지 않는 것이 야(野)의 매력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때론 통제된 야(野) 성이 건강한 생명력을 유지하는데 더없이 소중한 양분이 된다. 문제는 중심을 잡는 것인데, 이 부분에서 건강한 야성과 그렇지 못한 야성이 갈린다. 리더십 스토리셀러, CEO 리더십 연구소 김성회 소장은 그의 저서 『리더를 위한 한자 인문학』 에서 야(野)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야(野)는 마을로부터 떨어져서 꾸미지 않은 본래 모습의 들, 벌판을 가리킨다. 사람이 북적이는 동네가 읍(邑)이라면 그 바깥쪽이 교(郊)이고, 그 너머가 야(野)다. 야(野)를 넘어선 바깥쪽이 임(林), 거기서 더 멀리 떨어지면 경(冂)이 된다. 그러니까 사람이 북적이는 동네와 우거진 숲 사이가 야(野)다. 경(冂)이나 임(林)으로 치우치면 야만스럽고, 교(郊)와 읍(邑)에서만 복작거리면 고유의 본성을 잃고 퇴화한다”
치우침을 경계하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정치적 관점으로 접근해도 틀리지 않는다. 이번 21대 총선에서 제 1 야당은 참패를 면치 못했다. 극우 성향을 끌어 안다 보니 야만스럽게 비춰진 면이 강했다. 덕분에 중도 표심이 들어갈 공간은 턱 없이 좁았다.대안도 없으면서 사사건건 반대만 일삼는 모습에선 국민적 피로감만커졌다. 포용은 없고 투쟁만 일삼는 극단적 쏠림 속에 발생한 C19는, 야당의 목소리를 지워버리기에 충분했다. 선거 유세 막판에 터진 막말은 야만스러운 이미지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생각지도 않았던 위성 정당까지 만들면서 꼼수 정치의 진수를 선보였다.이는 결국 소수 정당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려던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본래 취지를 제1 야당이 앞장서서 짓밟은 꼴이 되고 말았다.
덕분에 소수 정당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게 되었고, 교(郊)와 읍(邑)에서 복작거리다 보니 야(野)가 지녀야 할 고유의 본성은 물론,그나마 가지고 있었던 힘을 잃어버리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다.
이미 지난 이야기지만 이번 21대 총선은 야(野)가 지녀야 할 특유의 유연성이 사라지고, 거친 야성이 필요 이상 어필될 경우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경험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야당을 이끌어 갈 지도자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가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국민의 소리를 대변하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이는 비단 야당만의 몫은 아니다.
광야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를 외면하는 순간 여당도 야당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 가정, 집단, 국가를 막론하고, 따르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그때부터는 리더라고 할 수 없다. 조직 구성원이 리더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 말은 허공으로 흩어지는 소음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1대 국회는 여도 야도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리더십이 발휘될 수 있어야 한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꼴사나운 여당의 모습도, 나약하고 무기력한 야당의 모습도 원치 않는다. 협치를 내세우면서 뜻대로 안 되면 상대 당을 탓하면서, 문을 걸어 잠그고 독주하는 이상한 정치도 원치 않는다. 현재의 표를 얻기 위해 미래의 위험을 외면하는 포퓰리즘성유혹도 경계해 주길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새로 시작된 국회에 한 가지는 분명하게 주문하고 싶다. 제발 국민의 소리를 잘 듣고 반영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국회다운 국회, 의원 다운 의원으로 기억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