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추석, 양광모

추석



양광모



연어처럼 돌아간다



어린 새끼들을 이끌고


오래전 떠내려 왔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면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유년의 비늘들



빈 주머니면 어떠리


내일은 보름달이 뜨리니


가난한 마음에도 달빛은 한가득



밤이 깊을수록


송편은 점점 커지고


아비 어미 연어 얼굴에는


기쁨이 사뭇 흘렀다



[태헌의 한역]


秋夕(추석)



回歸似鰱魚(회귀사연어)


但携稚子身(단휴치자신)


往昔漂下處(왕석표하처)


溯流向上臻(소류향상진)


秋日淸陽灑(추일청양쇄)


閃燿幼年鱗(섬요유년린)


空囊又如何(공낭우여하)


明日望月生(명일망월생)


含羞貧心地(함수빈심지)


素光亦滿盈(소광역만영)


十四夜加深(십사야가심)


松餠漸漸大(송병점점대)


父母鰱魚顔(부모연어안)


喜樂頗流外(희락파류외)



[주석]


* 秋夕(추석) : 추석, 중추절.


回歸(회귀) : 돌아가다. / 似(사) : ~과 같다. / 鰱魚(연어) : 연어.


但(단) : 다만, 오직. / 携稚子(휴치자) : 어린 새끼들을 이끌다, 어린 아이들을 이끌다. / 身(신) : 몸, 사람.


往昔(왕석) : 옛날, 이전, 오래전. / 漂下(표하) : 떠내려가다. / 處(처) : 곳, 장소.


溯流(소류) :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다. / 向上(향상) : 위를 향하여. / 臻(진) : 이르다, 가다.


秋日(추일) : 가을, 가을날. / 淸陽(청양) : 맑은 햇살. / 灑(쇄) : 뿌리다, 쏟아지다.


閃燿(섬요) : 번쩍거리며 빛나다, 반짝이다. / 幼年(유년) : 유년, 어린 시절. / 鱗(린) : 비늘.


空囊(공낭) : 빈 주머니. / 又(우) : 또. / 如何(여하) : 어떠냐, 어떠한가?


明日(명일) : 내일. / 望月(망월) : 보름달. / 生(생) : 생기다, 돋다.


含羞(함수) : 부끄러움을 머금다.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貧心地(빈심지) : 가난한 마음의 땅, 가난한 마음.


素光(소광) : 흰 빛, 달 빛. / 亦(역) : 또한, 역시. / 滿盈(만영) : 가득 차다.


十四(십사) : 14일. / 夜加深(야가심) : 밤이 깊이를 더하다, 밤이 더욱 깊어가다.


松餠(송병) : 송편. / 漸漸(점점) : 점점. / 大(대) : 크다, 커져가다.


父母鰱魚(부모연어) : 아비 어미 연어. / 顔(안) : 얼굴.


喜樂(희락) : 기쁨, 기쁨과 즐거움. / 頗(파) : 자못, 사뭇. / 流外(유외) : 밖으로 흐르다.



[한역의 직역]


추석



연어처럼 돌아간다


다만 어린 새끼들 이끄는 몸


오래전에 떠내려 왔던 곳으로


물살 거슬러 위로 가노라면


가을날 맑은 햇살 쏟아져


반짝이는 유년의 비늘들


빈 주머니면 또 어떠랴


내일은 보름달이 돋으리니


부끄럼 머금은 가난한 맘에도


달빛은 또한 가득하리라


열나흘 밤이 깊이 더할수록


송편은 점점 커져가고


아비 어미 연어 얼굴에는


기쁨이 자못 밖으로 흘렀다



[한역 노트]


추석을 노래한 시는 대개 추석 당일의 일이나 생각 등을 다루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시는 귀향할 때의 심사와 추석 전날의 소회(所懷)까지만 읊은 시라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추석을 핍진(逼眞)하게 노래한 시로 간주하기에 손색이 없다.


연어처럼 돌아간다는 것은 연어가 모천(母川)으로 회귀하듯 사람들이 명절을 쇠고자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을 비유적으로 일컬은 것이다. 이 시에서 ‘연어’는 간접적으로 표현한 ‘비늘들’까지 포함하면 도합 세 군데서 언급되고 있는데, 첫 번째 연어는 자식들을 달고 있는 성인이 된 현재의 자신을 가리키고, ‘유년의 비늘들’은 부모의 슬하를 떠나 대처로 나왔던 추억 속의 어린 자신을 가리키며, ‘아비 어미 연어’는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추억을 소환하는 비유로 활용된 ‘유년의 비늘들’은 귀향하는 연도(沿道)에 보게 된, 고요한 강심(江心)의 반짝이는 윤슬에서 그 힌트를 얻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시인이 얘기한 “반짝이는 유년의 비늘들”은 기본적으로 밝은 추억의 언저리를 환기시키는 것이지만, 또한 귀향의 발걸음이 가벼움을 에둘러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가벼운 발걸음은 “빈 주머니”를 자각하는 대목에 이르러 잠시 주춤하게 되었을 것이다. 자칫 발걸음이 무거워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시인은 추석날에 가득할 달빛을 상상하였다. 흰 눈이 있어 겨울이 비로소 공평한 계절이 되듯, 밝은 달빛이 있어 추석도 마침내 공평한 날이 될 것이다. 빈자(貧者)의 뜰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드는 품새 넉넉한 달빛을 마주하여 가난한 마음자리 달래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일까?


올 추석은 시의 마지막 연과 같이 먹거리가 흡족할 정도로 갖추어진다 하여도 ‘아비 어미 연어’가 얼굴에 기쁨을 흘리지 못할 공산이 크다. 대처로 나간 자식들이 연어처럼 고향으로 회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물로 인해 우리는 봄도 잃고 여름도 잃어버렸는데, 급기야 가을철 빛나는 명절까지 잃어버리게 될 이 상황을 도대체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하는 걸까? 이맘때면 연어들이 거슬러 올라가던 저 강은 말이 없다.


역자는 4연 13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14구의 오언고시(五言古詩)로 재구성하였다. 원시의 1연과 2연을 묶어 6구로 구성된 하나의 단락으로 한역하고, 3연과 4연은 각기 4구로 구성된 단락으로 한역하였는데, 각 단락마다 운(韻)을 달리하면서 짝수 구 끝에 압운하였다. 그리하여 이 한역시의 압운자는 ‘身(신)’·‘臻(진)’·‘鱗(린)’과 ‘生(생)’·‘盈(영)’, ‘大(대)’·‘外(외)’가 된다.


♣ 여적(餘滴) : 원시와 마찬가지로 추석 하루 전에 지어진 옛 시 한 편을 여기에 붙여두고 허허로움을 달래본다. 명절이 뜻과 같을 수 없어 조바심을 내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술잔 기울이는 것도 어찌 그리 똑같은지…… 시는 송(宋)나라 손복(孫復)의 지은 <팔월십사야월(八月十四夜月)>이다.


銀漢無聲露暗垂(은한무성로암수)


玉蟾初上欲圓時(옥섬초상욕원시)


淸尊素瑟宜先賞(청준소슬의선상)


明夜陰晴未可知(명야음청미가지)



은하수 소리 없고 이슬 가만히 떨어지는데


옥 두꺼비 달이 막 돋아 둥글어지려는 때


맑은 술과 흰 거문고는 의당 먼저 즐겨야지


내일 밤이 흐릴지 맑을지 알 수가 없으니



2020. 9. 29.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