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석칼럼] 혼돈의 세상 무엇이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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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은유는 좋은 이해를 낳는다. 훌륭한 은유는 비슷하지 않은 것에서 비슷한 것을 찾아내는 관찰자의 직관을 드러낸다. 이는 천재성의 표현이다.
은유는 이미지를 통해 본질을 꿰뚫어보는 힘이다.
기원전 6세기 그리스 여류 시인 사포는 사랑을 이렇게 묘사했다. “다시 사랑이 온다. 사지를 부수고 고문하는, 달콤하고 고통스러운 그는 내가 이길 수 없는 괴물이다.”
스토아학파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욕망의 핵심을 은유로 드러내기도 했다. “입구가 좁은 병에 팔을 집어넣고 과일을 가득 쥔 아이를 생각해보라. 이 아이는 팔을 빼지 못해서 울게 될 것이다. 과일을 버리면 손을 다시 뺄 수 있다. 욕망도 이와 같다.”
이처럼 차원 높은 사고와 언어의 바탕에는 반드시 은유가 있다. 플라톤의 ‘동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의 사다리’, 다윈의 ‘생명의 나무’,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등 모든 사상의 대가들은 은유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한눈에 보여준다.
은유는 천재들의 도구다. 우리가 은유를 익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詩)를 읽는 것이다. 시는 은유의 보물 창고다.
“예술이 가진 창조성의 근원은 무엇입니까?”라고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 물었다. 답하길 “그 것은 은유이다”라고 했다. 인간은 은유를 통해 사고한다.그러나 은유를 남용하면 문맥이 어지럽고 문장의 뜻이 모호해질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시인들, 뛰어난 작가, 이른바 예술가들은 서로 닮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닮은 점을 뽑아내어 새로운 그림을 만들어내는 재능을 지녔다.
그들은 우리에게 현실을 직시하는 새롭고 다채로운 방식을 풀어놓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특별하게 평가한다.
어떤 은유는 인간의 사고와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도록, 오랜 세월 동안 중요한 상징으로 인정받는다.
그중 하나가 바로 ‘동산’이다. 동산은 한자어처럼 보이지만 순 우리말이다. 동산은 자그마한 동네 산이고 정원이며 화단이기도 하다.
▲ 동산은 우리가 세상을 설명하는 은유다.
제우스가 헤라와 결혼한 헤스페리데스의 정원에서부터 불교의 룸비니 동산, 서방정토, 선종의 고산수정원 그리고 에덴동산까지. 과거와 현재의 모든 종교에서 우리는 동산과 정원의 흔적을 발견한다.
중국 옛 속담에 “남자가 일주일의 행복을 원한다면 아내를 데려가야 하고, 한 달간 행복하길 원하면 돼지를 잡아야 하지만, 영원한 행복을 원한다면 정원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남자와 아내를 반대로 바꿔도 뜻은 마찬가지다. 이 속담의 요점은 정원은 흔히 낙원으로 표현되는 지극히 행복한 상태를 곧잘 나타낸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자연(自然)이 아니고 동산일까?
인간의 역사는 자연을 피해 살아오다시피 했다. 거친 수목과 풀 그리고 드센 물속에서 인간을 살 수 없다. 자연과 인간의 적정한 교점 공간이 동산이고 정원이다. 정원은 내가 원하는 대로 어느 정도 인위적 꾸밈이 가능하다.
▲ 마야부인이 이미 알고 있었을 룸비니 동산
기원전 560년 경이다. 첫아기는 친정집에 가서 낳는 것이 당시 사카족의 풍습이었다. 마야부인도 관습에 따라 아기를 낳기 위하여 친정으로 향했다. 목적지인 데바다하 성까지는 아직도 남은 길이 꽤 된다.
온갖 과일이 열리는 나무는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했으며 맑게 흐르는 시냇물과 여러 곳에 연못들은 거울처럼 맑은 훌륭한 동산이었다. 아름다운 룸비니 동산을 감상하던 마야부인은 출산의 진통이 있음을 깨달았다.
일행은 아쇼카 나무 밑에 장막을 쳤다. 아쇼카 나무는 한역으로 ‘무우수(無憂樹)’라 쓰며 그 뜻은 ‘근심 없는 나무’이다. 이 나무는 봄을 상징하는 나무로 순백의 꽃을 피우는 상서로운 나무로 알려져 있다.
태어난 아기는 오른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은 땅을 가리키며,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당당하게 말하였다. ‘하늘 위 하늘 아래 내 오직 존귀하니 온통 괴로움에 휩싸인 삼계, 내 마땅히 안온하게 하리라.’ 하늘에서는 꽃비가 쏟아졌다 한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즉행칠보(卽行七步)를 하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선언을 했다는 룸비니 동산은 현재 네팔에 속해있다.
부처의 탄생지가 으리으리한 왕궁이 아니라 친정 가는 여정에 지금은 평지처럼 되어있는 아기자기한 동산이고 나무에 쳐 놓은 천막 그늘이라는 것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편안한 물과 꽃나무가 있는 아름다운 동산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곳은 마야부인이 이미 집을 떠나기 전부터 아마도 알고 있었고 출산을 할 장소로 마음에 둔 장소였으리라.
▲ 서양문명의 시작인 에덴동산은 어떤가?
영국의 시인인 제임스 세일은 ‘모든 좋은 것들은 다 정원 안에 있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은 이곳에서 시작됐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인간은 원래 각종 나무와 꽃, 약초가 자라는 안전한 장소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삶은 그 자체의 풍요로움과 화려함 속에서 번창했고, 모든 동물은 인간의 통제하에 있었으며 인간에 의해 이름 지어졌고 안전을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는 낙원에서, 서양문명은 시작했다.
정원은 황무지나 혼돈, 또는 위험과 변화무쌍함이 아닌, 안전하고 안정적이며 체계적인, 삶의 의미가 있는 평화로운 장소를 의미한다.
정원에서 찾을 수 있는 여러 의미 중 평화는 매우 중요한 단어다. 왜냐하면, 우리가 쏟아붓는 모든 노력과 헌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마음의 평화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충분한 돈, 권력, 지식이 있다면 안정감을 느낄 것이고 마음의 평화 또한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잘못된 생각에 빠진다.
그러나 모든 진정한 영적 전통들은 돈과 권력, 지식이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것들은 우리를 점령하고 영혼마저 가두어 파괴한다. 영국의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우의 걸작 ‘파우스트 박사의 비극’을 보라.
그는 뛰어난 학자였지만, 지적 호기심과 세속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박사는 결국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았고 그는 최후에 낙원과는 아주 먼 지옥으로 떨어졌다.
수많은 영적 수행과 전통들은 인간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열반의 세계 또는 천국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동의하든 안 하든,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우리가 있어야 할 이상적인 곳이 아님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정원’에 있어야 하는 존재가 아닌가.
무신론자들과 계몽주의 사상가들 역시 같은 생각이다. 프랑스 계몽주의 대표적 사상가 볼테르는 소설 ‘캉디드’의 마지막을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정원을 가꿔야 한다(One must cultivate one’s own garden)”는 강한 권고로 끝냈다.
▲ 현실은 낙원 대신 황무지만
20세기 초, 작가 제임스 앨런은 그의 저서 ‘위대한 생각의 힘’에서 말했다.
“사람의 마음은 정원과 같아 지혜롭게 경작될 수도 있고 거친 황무지가 되도록 방치될 수도 있다. 그러나 경작되든 방치되든 그 땅은 생명을 육성할 것이다. 유용한 씨앗이 심어지지 않으면, 어디선가 쓸모없는 잡초 씨가 날아와 그 종자를 계속 생산할 것이다.”
동산에서 쫓겨난 후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갖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임을 발견했다.
여기서 우리는 동산에서의 쫓겨남이 유대교나 기독교만의 은유가 아님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모든 진정한 종교는 이를 은유하는 독자적인 내레이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낙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우리의 진정한 운명이라고 믿고 있다.
사실, 종교(Religion)라는 단어는 어원학적으로 “우리가 있어야 할 낙원에 도달하도록 자신을 묶어놓거나 단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시대를 초월해 모든 인간은 정원으로, 낙원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낙원에 도달하는 길은 절대로 평탄하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마음의 평화 대신, 주변에서 자라고 있는 무성한 잡초와 가시가 넘치는 황무지를 더 쉽게 발견하곤 한다.
▲ 지상의 낙원
태초에 쫓겨남 이후로 우리는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고 자신을 느낄 수 있는 진짜 정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존 밀턴의 서사시 ‘실낙원’의 끝에서도 낙원에 대한 우리의 그리움과 갈망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뒤돌아보며, 그간 그들의 행복한 거처였던 동쪽의 낙원을 바라보았다. 불타는 칼이 그 위에서 빛나고 있었고, 문에는 무서운 얼굴들과 불을 휘감은 무기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눈물이 흘렀지만, 곧 닦아냈다.”
우리는 단테의 ‘신곡’에서도 지상 낙원이 연옥의 산 정상에 중요한 출구로서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찾을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람들의 사후를 위한 엘리시안이라는 낙원을 갖고 있었고, 고대 이집트 설화에서는 낙원을 갈대밭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생명이 경작되고 자라는 목적이 있는 장소를 의미했다.
그리고 이것은 인류가 이 땅에 에덴동산을 재창조하고자 해왔다는 것을 명백하게 증명해 준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건설한 바빌론의 공중정원이나 18세기 영국 조경 건축가 ‘케이퍼 빌리티’ 브라운의 걸작으로 꼽히는 ‘블레넘 궁전의 말보로 메이즈’ 역시 이를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다시 작가 제임스 앨런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사람의 마음은 정원과 같다.”는 그의 말을 깊이 음미해 보면 우리가 원하는 진짜 평온한 정원은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생각해 보자. 인류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술이다.
은유적으로 답해본다면 “위대한 예술은 색과 소리와 언어가 동산과 정원이 되는 것”이다. 생각, 감정, 정신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정원을 위대한 예술 안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예술은 예술가 자신도 모르는 내면의 풍부한 예술적 창의성은 물론이고, 한편으로는 정확하게 계산한 절제와 목표가 내포돼 있다.
그래서 색상에는 패턴이 있고 소리에는 하모니가 있으며 언어에는 규칙과 체계가 있다.
‘그림은 자신이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그리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고 그 나타냄은 자기만의 균형(Balance)이 있어야 한다.’ 세계적인 디지털 미디어 아티스트 후랭키 화백의 말이다.
즉 마음 정원 가꾸듯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조화롭게 꾸며서 균형 있게 나타낸다는 것이다.
만약 애완견 천 마리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오토스케치’가 깔린 태블릿과 펜을 주고 디지털 그림을 그리도록 천 년 동안 기다린다고 해보자. 더 오랜 시간을 기다린다고 해도 후랭키와 견줄 만한 그림은 단 한 쪼가리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 혼돈의 세상, 예술가에게 길을 묻는다.
코로나 19가 진정되기는커녕 전 세계적으로 재 확산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바이러스의 출현도 거의 1년마다 나오는 실정이다. 현재도 힘들고 두려운데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미중 패권 전쟁으로 전 세계가 전쟁의 위험까지 도사린다. 미국은 대통령 당선자가 누구인지 아직 모른다. 누가 당선되는 문제를 떠나 민주주의 근간을 해치는 부정선거 문제가 글로벌 문제로 확산 조짐이 있다.
장사는 안 되는데 임시로 푼 돈이 주식과 주택으로 몰려 이상한 경제 상황이 지속한다. 언젠가 터질 수 밖에 없는 버블로 돈이 몰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은 3개월 안에 큰 재앙이 온다며 보유 자산을 매각하여 800억 달러를 현금화 하였다.
권력과 관련한 수사를 진행한 검찰총장이, 검찰개혁이라는 이름하에 법무부 장관에게 사상 초유의 직무배제가되었다. 국익과 전혀 관계없는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 이야기가 연일 언론을 뒤덮고 있다.
3차 긴급재난지원금 말이 정치권에서 나오는 걸 보니 선거가 곧 다가오는 모양이다.
예견된 징조 현상으로 충분히 미리 막을 수 있는 위기인데도 정작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몸이 굳어버리게 되거나 대처 방법을 알지 못해 부인해 큰 위험에 빠지게 하는 미셸 부커가 말한 회색 코뿔소(Gray Rhino)가 오고 있다.
그뿐이랴. 예측할 수 있으면서도 제때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아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화이트 스완(White Swan), 경험하지 못한 ‘블랙스완(black swan)’도 예측할 수 없는 이상 기후변화인 ‘그린 스완(green swan)’까지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세상 안팎이 혼란스럽다. 혼돈과 무작위성이 점점 더 증가하는 요즘이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에 정원을 가꾸는 예술가들의 작품은 결코 그 혼돈과 무작위성 속에서 헤매지 않는다. 냉정하리만큼 핵심을 더 잘 찾아 들어가 그림으로 시로 음악으로 표현한다.
우리는 끝없이 무엇인가 원하고 구하는 삶 속에서 왜 사는지조차 모르며 하루를 산다. 행복의 본질을 놓치고 곁가지를 잡으려 허우적거리며 늘 바빠게 ‘위대한 삶’이 무엇인지 방향을 잃고 살아간다.
그래서 예술가, 작곡가, 시인에게 점점 더 ‘위대한 예술’ 활동이 필요한 시대이다. 우리는 그들의 작품 속에서 지치고 고단해진 마음을 추스르고 충전하여 힘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잃어버렸던 동산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은 동산(정원)이다.
한경닷컴 칼럼니스트 박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