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검은 눈물, 김병수

검은 눈물



김병수



집안에 장정 없이


한겨울 보내야 했던 어머니


헛간 한가득 연탄 채워놓으면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다며


속으로 꾹꾹 삼키던 그 눈물



[태헌의 한역]


黑淚(흑루)



家中無壯丁(가중무장정)


母親苦過冬(모친고과동)


頻曰以炭盈虛廳(빈왈이탄영허청)


不食餐飯腹自充(불식찬반복자충)


傷悲常內呑(상비상내탄)


黑淚數百鍾(흑루수백종)



[주석]


* 黑淚(흑루) : 검은 눈물. 시를 지은 이의 자가어(自家語)인 ‘검은 눈물’을 한문식으로 표기한 말이다.


家中(가중) : 집에, 집안에. / 無壯丁(무장정) : 장정이 없다, 남자 성인(成人)이 없다.


母親(모친) : 모친, 어머니. / 苦過冬(고과동) : 월동(越冬)을 괴로워하다.


頻曰(빈왈) : 자주 말하다. ‘頻’은 한역(漢譯)의 편의상 역자가 보충한 글자이다. / 以炭盈虛廳(이탄영허청) : 연탄으로 헛간을 채우다. ‘炭’자는 ‘연탄(煉炭)’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虛廳’은 헛간을 가리키는 우리식 한자어이다.


不食(불식) : 먹지 않다. / 餐飯(찬반) : 밥, 끼니. / 腹自充(복자충) : 배가 저절로 채워지다, 배가 저절로 불러오다.


傷悲(상비) : <마음이> 아프고 슬프다, 아픔과 슬픔. / 常(상) : 늘, 항상. / 內呑(내탄) : 안으로 삼키다. ‘傷悲’ 이하는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다소 의역하면서 원시(原詩)에 없는 시어들을 얼마간 보충하였다.


數百鍾(수백종) : 수 백 잔. 여기서 ‘鍾’은 분량을 헤아리는 부피의 단위로 사용하였으며 편의상 ‘잔’으로 번역하였다.



[한역의 직역]


검은 눈물



집안에 장정이 없어


월동이 괴로우셨던 어머니


자주 말씀하셨네,


연탄으로 헛간 채우면


밥 먹지 않아도


배가 절로 부르리라고……


슬픔을 항상 안으로만 삼켜


검은 눈물이 수 백 잔!



[한역 노트]


이 디카시(詩)를 쓴 김병수씨는 이른바 제도권 시인은 아니지만 SNS 공간에서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문학 애호가이다. 역자가 이 시의 한역을 계획하고 칼럼을 준비하면서 두어 가지 사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던 것은, 자전적(自傳的)인 이 시에 쓰인 “집안에 장정 없이”라는 말을 짐작만으로 추단하는 게 결례가 될 수 있겠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시골 출신인 글쓴이의 부친께서 당시에 환중(患中)이어서 집안에는 일을 할 장정이 없었다고 한다. 글쓴이는 당연히 어렸을 것이고, 형제자매가 있었다 해도 어리거나 누이들이었을 것이다.


6~70년대의 시골은 대개 땔나무를 연료로 삼았기 때문에 농한기인 겨울도 그리 녹록한 계절이 아니었다. 집안에 장정이 있어도 장정만의 노동력으로는 땔나무 마련하기가 여의치 못하여, 겨우 초등생 정도의 어린 아이들까지 땔나무 채취에 동원되는 일이 허다하였다. 역자 역시 그 나이 무렵에 세 살 아래의 동생과 함께 땔나무하러 다녔던 기억이 지금껏 생생하기만 하다. 그런데 집안에 일할 장정이 없었다면 그 녹록치 못함은 훨씬 더 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이나 여자들의 노동력이 장정에 비하면 한참 못 미쳤기 때문이다.


바로 이 시절에도 부유한 농가에서는 한겨울을 나기 위해 땔나무 외에 연탄을 쟁여놓는 경우가 많았다. 굳이 장정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손쉽게 겨울을 날 수 있게 하는 이 연탄에 대한 염원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어머니’는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겠다고 했을까? 고사리 손의 힘까지 빌려야만 겨우 겨울을 날 수 있었을 것임에, 연탄을 들여놓을 형편이 못되는 ‘어머니’의 상심(傷心)은 더욱더 크고도 깊었을 것이다. 글쓴이가 이를 표현한 말이 바로 이 시의 제목이기도 한 ‘검은 눈물’이다. 검은 빛깔의 연탄으로 인해 흘리게 된 상심의 눈물이라는 뜻의 이 말은, 시의 대의(大意)를 이해하는 데 있어 더없이 유용한 글쓴이의 자가어(自家語:자기 스스로가 만들어 낸 말)이다. ‘검은 눈물’이라는 이 말 속에 글쓴이의 눈물은 또 얼마나 스며들었을까?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김장을 담그는 풍경과 함께 연탄 배달 광경을 대대적으로 보여주면서 “월동 준비”를 독려하던 그 시절 뉴스도 이제는 추억 속에서나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시골에서 제법 오랫동안 부농(富農)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던 연탄이, 도회지에서 가난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으니 이 또한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 할 수 있겠다. 가난했던 시절 그 추억의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아픔이나 슬픔도 세월이 가면 모두 역사가 된다. 어디 그 뿐이랴! 그 시절의 비애가 때로 이렇게 시(詩)로 태어나기도 하니 아팠거나 슬펐던 시절도 가끔은 찾아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어머니’가 흘렸던 그 검은 눈물을 마르게 하지는 못한다 해도 말이다.


역자는 연 구분 없이 5행으로 된 원시(原詩)를 오언 4구와 칠언 2구로 이루어진 고시로 재구성하였다. 한역하는 과정에서 원시에 없는 시어를 더러 보충하였으며, 원시 기준 제5행의 경우는 오언 2구로 늘려 재구성하면서 부득이 일부를 의역(意譯)하기도 하였다. 이 한역시는 짝수 구마다 압운하였으며, 압운자는 ‘冬(동)’·‘充(충)’·‘鍾(종)’이다.


2020. 12. 1.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