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보 다리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흘러간다

내 마음속 깊이 기억하리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것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보자

우리의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한 눈길의 나른한 물결이

흘러가는 동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사랑은 지나간다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은 가버린다

이처럼 인생은 느린 것이며

이처럼 희망은 난폭한 것인가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나날이 지나가고 주일이 지나가고

흘러간 시간도

옛 사랑도 돌아오지 않는데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미라보 다리에서 아침 강물을 본다. 햇살에 반짝이는 물무늬가 은어 떼처럼 싱그럽다. 수면에 비친 하늘은 비취색. 그 유명한 이름에 비하면 너무 평범해서 실망스러운 미라보 다리. 영화에 나올 만큼 현란하지도 않고 관광객이 북적거리는 명소도 아니다. 그냥 무표정하게 서 있는 철제 구조물일 뿐. 하지만 한 시인의 음성을 통해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한 울림을 주는 명작의 무대다.

미라보 다리의 몸체는 연녹색이다. 섬세한 문양의 금속 난간과 아치가 풀잎을 닮았다. 우아한 필기체의 문자 디자인이 다리 전체를 감싸고 있다. 2개의 기둥에는 상류와 하류 쪽에 각각 하나씩 모두 4개의 여신상이 조각돼 있다.

에펠탑에서 센 강 하류 쪽으로 세 번째 놓여 있는 다리. 자유의 여신상이 마주 보인다. 1895년에 완공됐으니 로마 태생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가 열아홉 나이로 파리에 입성하기 4년 전에 생겼다. 다리의 서쪽 끝에는 작은 명판과 ‘미라보 다리’를 새긴 시비가 붙어 있다.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앉은 청동 시비 앞에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오래도록 생각한다. 척박한 이 시대에 문학이란 무엇이며 사랑이란 무엇인가. 시간의 물굽이를 오르내리며 이렇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다리의 의미는 또 어떤 것인가.

다리는 강의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을 연결하는 물리적 교량이며 현실과 꿈을 이어주는 정신의 가교이기도 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돌아오는 길목. 다리는 사랑과 이별의 접점이며 희망과 좌절의 변곡점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피안의 세계가 거기에 있다. 이곳은 소멸과 부활의 명암이 교차하는 길이자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영혼의 통로다.

그 옛날 아폴리네르도 이곳에서 한동안 걸음을 멈추고 사색에 잠겼으리라. 이것이 그의 눈길이 머물렀던 자리, 그가 서서 바라보던 강물, 그가 시를 썼던 장소를 순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라보 다리 동쪽에 여행자들이 자주 들르는 카페가 하나 있다. 이름은 ‘레갈리아’. 80여 년간 한자리에서 미라보 다리와 시인의 팬들을 지켜본 일종의 주막이라고 할까.

중년의 카페 주인은 아폴리네르를 너무 좋아한다며 그의 시를 줄줄 외운다. 손님이 많아서 한가할 틈이 없어 보이는데도 짬만 나면 그 얘기다. 머리가 약간 벗겨진 그의 친구도 다리 건너편에서 일부러 건너와 자벨 역이나 앙드레 시트로엥 역에서 전철을 탄다면서 끼어든다. 다리를 건너는 동안 강의 양안처럼 생활의 양면을 돌아보게 된다는 설명까지 곁들인다.

손님 중 젊은 직장인들에게 아폴리네르 이야기를 꺼냈더니 몇몇은 매우 반가워하고, 몇몇은 ‘무슨 소리인가’ 하며 멀뚱거린다. 낭만적인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아주 유명한 시인이지만 프랑스에서는 아폴리네르를 모르는 사람도 의외로 많다.



아폴리네르는 미라보 다리에서 가까운 센 강 서쪽(파리 16구)의 그로 거리에서 한 시절을 보냈다. 지금의 ‘라디오 프랑스’ 건물 부근인데, 연인 마리 로랑생(1883~1956)의 집이 그 부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 로랑생은 파스텔 톤의 맑은 수채화를 많이 그린 화가다. 둘은 전위적인 화가와 시인들이 모여들던 몽마르트르의 낡은 목조건물 바토-라부아르(Bateau-Lavoir)에서 피카소의 소개로 만났다. 1907년이었으니 아폴리네르가 27세, 로랑생이 24세 때였다. 사생아라는 공통점을 지닌 두 사람은 금방 사랑에 빠졌고 문학과 예술의 동반자로 서로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폴리네르는 시칠리아인 퇴역 장교 아버지와 폴란드 귀족 어머니의 비밀 연애 끝에 태어났고, 로랑생은 귀족 출신 아버지와 하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앙리 루소의 그림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루소의 그림에는 ‘시의 여신’인 로랑생이 아폴리네르에게 영감을 주는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들에게 엉뚱한 사건이 닥친다. 1911년 유럽을 떠들썩하게 한 ‘모나리자’ 도난 사건이다. 루브르 박물관 전시실에서 누가 이 작품을 빼돌렸는데 범인이 이탈리아 남자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아폴리네르는 이탈리아인이란 이유로 용의 선상에 올라 1주일간 구금됐다가 친구들의 탄원으로 겨우 풀려났다. 이 어이없는 사건으로 연인 사이에 틈이 생겼다.

아폴리네르는 생미셸 광장의 옥탑방에 있는 친구 샤갈을 찾아가 신세한탄을 하며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해 뜰 무렵 집에 가려고 미라보 다리를 건넜다. 햇살을 받은 센 강의 물결은 눈부신데 도둑으로 오인 받고 애인한테 버림까지 받은 자신이 한탄스럽기만 했다. 그 가슴 아픈 이별의 회한을 담아 쓴 것이 ‘미라보 다리’다.

5년 넘게 이어온 둘의 사랑은 끝내 결실을 보지 못하고 서로 헤어지게 됐다. 그러나 결별 이후 둘은 시인과 화가로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아폴리네르는 ‘미라보 다리’를 포함한 첫 시집 《알코올》을 발표하며 일약 스타가 됐고, 로랑생도 개인전을 열면서 자신의 독특한 화풍을 인정받게 됐다.



실연의 상처를 안은 아폴리네르는 파리의 중심가인 생제르맹 데프레 거리로 옮겨갔다. 사르트르를 비롯한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모여들던 카페 레 되 마고와 카페 플로르를 지나 두어 블록만 가면 그가 살던 202번지다. 이곳 2층에서 그는 생의 마지막 열정을 불태웠다.

이사 온 이듬해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는 전쟁터로 달려갔다. 외국 국적인 그가 모든 것을 프랑스에 빚지고 있다며 자원해서 참전한 것이다. 전투 중 포탄 파편을 맞고 후송된 그는 뇌수술을 두 번이나 받아야 했다. 그 와중에 프랑스 국적도 받았다. 1917년에는 초현실주의라는 용어를 문예사조로 확립했고 유명한 《칼리그람》(도형시집)도 썼다. 그러다 종전을 이틀 앞둔 1918년 11월 9일, 그는 전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38세. 참으로 짧은 생애의 긴 여정이었다.

사람들은 예감했을까? 생전에 전위적이고 초현실적인 감수성으로 주변을 당혹스럽게 했던 그가 사후에 세계 문학사의 영원한 기둥으로 우뚝 서게 되리라는 것을. 그는 갔지만 그의 시는 지금 소르본 대학 등 최고 학부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암송되는 고전으로 살아 있다.

그 명작의 무대에서 맞는 한낮의 여유. 미라보 다리 위로 멀어져가는 연인들의 뒷모습이 참 어여쁘다. 저만치 자유의 여신상 이마에 내려앉는 햇살도 갓난아기 발뒤꿈치처럼 발갛다.